수필123 부부의 날, 우리는 아직도 데이트 중 -휘준-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세요?”아침 식탁에서 아내가 물었다. 아내는 뭔가 기대에 찬 눈빛이었다. 나는 순간 땀이 났다.“설마… 당신 생일? 아니지, 어버이날은 지났고, 스승의 날도 지났는데…”“후후. 바로 ‘부・부・의・날’입니다!”“그거 만든 사람이 아직도 부부일까…”사실 난 부부의 날이 있는 줄도 몰랐다. 결혼기념일은 혼자 기억했다가 대여섯 번 까먹었고, 생일도 몇 번이나 깜빡했다. 그런데 아내는 유난히 이 날에 집착한다.“우리 한강 한번 갈까요? 여유롭게 산책도 하고, 손도 잡고…”“손은 안 놓고 살았는데 굳이 또 잡아야 하나?”“이 양반, 낭만이 없어요. 나 오늘만큼은 ‘연애 시절 감성’으로 살 거예요.”그리하여 우리는 한강으로 향했다. 아내는 운동화를 신고 나는 한물간 로퍼를 신었다. 옷장에서 찾.. 2025. 5. 22. 5월의 바람은 나를 자꾸 옆길로 데려간다 -휘준- 5월의 바람은 묘한 힘이 있다.창문을 반쯤 열어놓고 있으면,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와 나를 흔든다. 무언가를 하던 손이 멈추고, 나도 모르게 먼 산을 바라보게 된다.바람이 어디서 불어왔는지는 모르겠는데, 마음 어딘가 깊은 곳을 스치고 지나간다. 오늘도 그랬다.별다른 일도 없던 날이었다. 마요네즈가 다 떨어졌다는 아내의 말에 허리쌕 하나 차고 집을 나섰다.그저 마트에 들렀다가 곧장 돌아올 생각이었다.그런데 대문을 나서는 순간, 바람이 살짝 내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오래된 친구처럼, 아무 말 없이 슬쩍. 그래서 나는 방향을 틀었다.마트 말고 전철역으로. 10분만 타면 아주 오래전에 살던 동네에 이른다. 내가 서른 즈음이었을까. 퇴근길마다 일부러 돌아 걷던 길이 아직도 있었다.집에 빨리 가고는 싶었지만, 막상.. 2025. 5. 21. 내 팬티를 벗긴 자, 그는 무죄인가 -휘준- 화장실 옆 칸에 아는 사람이 들었을 때,작은 인기척으로도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곳엔 신문을 들고 느긋하게 갈 때도 있고일그러진 표정으로 다급히 갈 때도 있지요. 아시아나 특파관리 시절, 표정뿐만 아니라 자세 전체가 일그러졌던 날의 얘깁니다.배변의 고통을 참으며 화장실을 향해 복도를 걸었습니다.계속 걷기 힘들 땐 벽보를 보는 척 돌아서서 쉬거나무릎을 꼬고 까치발을 들며 내공을 쌓기도 했습니다. 오가는 사람과 눈인사를 나눌 때,이를 악문 미소 때문에 들켰는지도 모릅니다.가까스로 도착한 화장실 문 앞에서점잔을 빼며 똑 똑 노크했는데 안에서 "누구세요?"하고 묻는 짱구가 있었습니다.이 괴팍한 질문에 난 웃음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참을 수 없는 게 웃음뿐이겠는가. 입술에서 풋-하고 .. 2025. 5. 20. 윤여선의 土曜斷想 '푸른 해원을 향해 흔드는 깃발' 제 183회 외출할 때 꼭 챙기는 것이 손수건입니다. 때로는 지갑이나 핸드폰보다 먼저 찾아 호주머니에 넣는 것이 손수건이지요.간혹 실수로 손수건을 챙기지 못한 채 밖에 나서는 때가 있는데, 그때는 외출 시간 내내 쉽게 표현할 수 없는 허전함과 불안감을 느낍니다. 물론 재채기에 취약한 체질이라서 손수건을 챙기지 않으면 안되는 점도 있긴 하지만, 오래된 습관때문인지 손수건이 주머니 속에 꼭 들어 있어야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물품들의 중요성을 그것이 지니고 있는 물질적 가치로만 따진다면 손수건은 아마도 가장 아랫자리 저만치에 놓여 있을 것입니다. 하나의 천조각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세상의 모든 존재는 그것이 지니고 있는 물질적 가치의 크고 작음만으로 중요성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시.. 2025. 5. 19. 화장실 낙서, 이쯤 되면 빌보드차트에 뜰라 -휘준- 시립도서관 2층 남자화장실 첫 번째 칸에 앉으면 적나라한 19금 그림 한 컷이 눈을 확 끈다. '이거 그린 놈 대학생 아니다. 대학생이면 좀 더 잘 그렸어야지!' 더 자세히 보고 싶은 아쉬움은 외면당한 채, 엄한 꾸지람을 달고 있다 '낙서하지 마. 세끼들아!' 누군가 빨간 볼펜으로 맞춤법도 지적했다 '↙틀렸음 새끼(○)' 빨간 글씨는 다시 길게 휘어진 화살표에 끌려가 굵은 사인펜으로 얻어맞았다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 쉐끼들아!!'느낌표가 두 개나 붙었다. 그만큼 센 소린가? 머리 위에서 쇠파이프를 타고 내린 찬물 한 통이 푸하하 쓸려나가고 파란 창에 구름 반쪽 갸우뚱 인다그래 어쩌면 아주 오래전엔 '세끼'가 맞는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담엔 '쉐끼'로 변할 수도 있어. 맞춤법이란 시대에.. 2025. 5. 19. 무소유 / 법정 "나는 가난한 탁발승이오. 내가 가진 거라고는 물레와 교도소에서 쓰던 밥그릇과 염소젖 한 깡통, 허름한 담요 여섯 장, 수건 그리고 대단치도 않은 평판, 이것뿐이오."마하트마 간디가 1931년 9월 런던에서 열린 제2차 원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가던 도중 마르세유 세관원에게 소지품을 펼쳐 보이면서 한 말이다. K. 크리팔라니가 엮은 을 읽다가 이 구절을 보고 나는 몹시 부끄러웠다. 내가 가진 것이 너무 많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금의 내 분수로는 그렇다.사실,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날 때 나는 아무것도 갖고 오지 않았었다. 살 만큼 살다가 이 지상의 적籍에서 사라져 갈 때에도 빈손으로 갈 것이다. 그런데 살다 보니 이것저것 내 몫이 생기게 되었다. 물론 일상에 소용되는 물건들이라고 할 수도 있다.. 2025. 5. 18. 이전 1 ··· 8 9 10 11 12 13 14 ··· 2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