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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122

형님 제가 '문자 보내기'를 못해서요 -휘준- 중고교 때 함께 운동하던 후배가 죽었다. 술을 좋아했으니, 술 때문에 노환이 일찍 온 것이리라. 벌써 별세라니 참으로 애석하다.이렇게 일찍 갈 줄은 꿈에도 모르고, 송년회 날짜를 잡다가 사망 소식을 들었다.​​어찌해서 우리에겐 부고가 닿지 않았을까? 이승을 떠날 준비도 못 하고 황망히 떠나간 사람. 송년회에 가면 이런저런 얘기를 들을 수 있겠지. 언제나 씩 웃으며 나타날 것 같은데,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갔다니 허망한 마음 금할 길이 없다.1년 후배지만 그와 나는 중학 3년 동안 교복과 교모가 달랐다. 그의 교복엔 백선이 없었으며, 내 교모엔 학교 표시가 있었지만 그의 모자엔 中 자만 있었다. 알량한 중학 평준화 때문이다.그러니까그러니까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 학년 이상은 각자 학교 표식.. 2025. 5. 6.
<3> 어린이날, 어린이다운 문장은 꼬리연의 꼬리처럼 -휘준- “할아버지, 글짓기하면 돈 많이 벌어요?”손주 녀석이 물었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젤리를 오물거리면서 눈으로도 물었죠.마침 얼마 전, 지방 잡지에 글이 실려서 원고료가 조금 들어왔던 참이었어요. “음… 치킨 네 마리 정도는 사 먹을 수 있지!”그랬더니 손주가 눈을 번쩍 뜨며 외칩니다.“와! 그럼 글 다섯 편만 쓰면 레고 왕국 세트 사겠다!”참, 아이답죠?그 계산이 너무 귀여워서 아이답게 웃었습니다.생각해 보면 저도 어릴 땐 그랬어요. 단순한 계산에 가슴이 뛰고,사탕 하나에 세상이 핑크빛으로 보였으니까요.어린이날이 다가오면 괜히 마음이 들썩입니다.누군가는 기념일이라지만, 제게는 ‘기억일’에 가깝습니다.어릴 적 어린이날은 꼭 즐겁지만은 않았거든요.먼저 떠오르는 건 아버지 지갑 사정이었습니다. 사과 한 알,.. 2025. 5. 5.
오월의 수필, 신록예찬 - 이양하 - 오월이다! 5월이면 생각나는 수필, 이양하의 푸른 수필 신록예찬 봄 여름 가을 겨울, 두루 사시를 두고, 자연이 우리에게 내리는 혜택에는 제한이 없다.그러나 그중에도 그 혜택을 풍성히 아낌없이 내리는 시절은 봄과 여름이요,그중에도 그 혜택을 가장 아름답게 내는 것은 봄, 봄 가운데도 만산에 녹엽이 싹트는 이때 일 것이다.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고 먼 산을 바라보라. 어린애의 웃음같이 깨끗하고 명랑한 오월의 하늘, 나날이 푸르러 가는 이 산 저 산, 나날이 새로운 경이를 가져오는 이 언덕 저 언덕, 그리고 하늘을 달리고 녹음을 스쳐 오는 맑고 향기로운 바람─우리가 비록 빈한하여 가진 것이 없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러한 때 모든 것을 가진 듯하고, 우리의 마음이 비록 가난하여 바라는 바, 기대하는 바가 없.. 2025. 5. 4.
<2> 감성은 살리고, 통장은 지켜야지 -휘준- 요즘 세상, 플렉스(flex)라는 단어를 모르면 대화가 안 된다. 누가 뭐 하나 샀다 하면 “오, 플렉스~!” 하고 추임새를 넣어야 ‘요즘 사람’ 소리를 듣는다.나도 뒤처질 수 없지. 생일도 아닌데 초콜릿 케이크를 샀고, 평소 안 사던 향초에 불을 붙였다. 마음먹고 ‘나를 위한 소비’를 실천해 봤는데, 문제는 그 뒤였다. 통장이 울었다.그러니까, 감성은 살았는데 통장이 죽었다는 얘기다. 이쯤 되면 균형이라는 게 필요하다. 감성도 살리고, 통장도 기절하지 않게 말이다. 플렉스는 좋은데, 현명한 플렉스가 필요하다.나만의 감성 레이더 켜기처음엔 나도 그랬다. 남들 하는 거 다 좋아 보였다. 누가 커피잔 들고 예쁜 카페에서 찍은 사진 올리면, 나도 괜히 앉아 있어야 할 것 같고. 유행하는 향수 보면 안 뿌리면 .. 2025. 5. 3.
<1>“그 돈이면 여행에 퐁당 빠질 수도...”를 실천해본 6개월의 기록 -휘준- 1. 하루 한 잔, 별생각 없이 넘기던 커피의 진실나는 커피를 참 좋아한다. 아니, 좋아했다.아침 출근길에 눈 반쯤 감은 채로 편의점에서 한 잔, 사무실 도착해서 회의 전에 한 잔,오후 3시에는 졸음 방지용으로 또 한 잔.거기에 주말이면 무조건 감성 카페 가서 디저트 하나에 라테 한 잔.문제는, 이게 습관이 되면 무서운 소비라는 거다.어느 날 카드명세서를 보다가 갑자기 멍해졌다. “이게 다 커피야?”놀란 마음에 손가락을 꼽아봤다. 하루 평균 1.5잔, 일주일이면 최소 10잔.한 잔 평균 4,500원이면, 한 달에 4만~6만 원은 그냥 커피값으로 날아간다는 결론.그때 머릿속을 스치는 한 마디.“그 돈이면, 진짜 여행 한 두 번은 간다.” 그 말이 농담 같으면서도 너무 현실 같았다.그렇게 나는 실험을 시작했.. 2025. 5. 2.
오월 -피천득- 오월 -피천득-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하얀 손가락에 끼어 있는 비취가락지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오월은 모란의 달이다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도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비늘잎도 연한 살결 같이 보드랍다스물한 살 나이였던 오월불현듯 밤차를 타고 피서지에 간 일이 있다 해변가에 엎어져 있는 보트덧문이 닫혀 있는 별장들그러나 시월 같이 쓸쓸하지는 않았다 가까이 보이는 섬들이 생생한 색이었다득료애정통고 사랑을 얻음도 고통이요실료애정통고 사랑을 잃음도 고통이다 젊어서 죽은 중국시인의 이 글귀를모래 위에 써 놓고,나는 죽지 않고 돌아왔다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사실이 참으로 즐겁다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나는 지금 오월 속에 있다 연한 녹색은 나날이 번져가고 있다어느.. 2025. 5.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