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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탐방기 – 자연에게 한 발 양보한 궁궐에서 돈화문을 지나, 궁궐이 숨을 고르는 방식 창덕궁의 첫인상은 언제나 조용하다. 경복궁이 정면으로 말을 거는 궁궐이라면, 창덕궁은 옆자리에서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건네는 궁궐이다. 돈화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세계유산’이라는 수식어보다 먼저 느껴지는 것은 이상하리만큼 편안한 기운이다. 궁궐인데도 긴장되지 않고, 왕의 집이었는데도 위압적이지 않다. 길은 반듯하지 않고, 건물은 똑바로 줄을 맞추지 않는다. 의도된 비대칭, 계산된 자연스러움. 조선의 궁궐이 모두 엄격한 질서 위에 세워졌을 것이라 생각했던 내 선입견은 이곳에서 조용히 무너진다. 창덕궁은 자연을 다스리려 하지 않고, 그 흐름을 받아들이는 쪽을 택했다. 언덕은 언덕대로 두고, 나무는 나무가 자란 방향을 존중한 채 그 사이에 전각을 얹어 놓았다... 2026. 1. 31.
덕수궁 탐방기 – 돌담길 안쪽에서 만난 가장 인간적인 궁궐 대한문을 넘는 순간, 궁궐의 표정이 달라졌다 덕수궁에 들어설 때마다 느끼는 첫 감정은 ‘가까움’이다. 오늘은 돌담길 안쪽에서 만난 가장 인간적인 궁궐에 대해 풀어보고자 한다. 다른 궁궐들이 일정한 거리와 각도를 유지한 채 방문자를 맞이한다면, 덕수궁은 한 발짝 더 다가와 말을 건다. 대한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서울 도심의 소음이 갑자기 사라지지는 않는다. 대신 그 소음이 낮아진다. 완전히 차단하지 않고, 조금 남겨 두는 방식. 그 점이 덕수궁을 더 현실적인 공간으로 만든다. 이 궁궐은 조선의 시작이 아니라 끝에 가까운 시간을 품고 있다. 왕조의 마지막을 향해 가던 시기, 격변의 시대를 통과하던 고종의 거처. 그래서일까. 덕수궁에는 웅장함보다 복잡한 감정이 먼저 배어 있다. 단정한 전각 사이로 서양식.. 2026. 1. 26.
경희궁 탐방기 – 사라진 것들 곁에서 더 또렷해지는 시간 궁궐이 있었음을, 궁궐답지 않게 말해주는 자리 경희궁은 처음부터 조용하다. 아니, 조용해 보인다기보다 스스로 소리를 낮춘 궁궐이다. 광화문이나 덕수궁처럼 사람을 불러 모으지도 않고, 창덕궁처럼 자연으로 감싸 안지도 않는다. 경희궁은 그저 그 자리에 남아 있다. 마치 “기억하고 싶은 사람만 기억해도 괜찮다”고 말하듯이.흥화문을 지나 경희궁 터로 들어서면, 궁궐을 걷고 있다는 감각보다 ‘옛 자리를 더듬고 있다’는 느낌이 먼저 든다. 전각은 많지 않고, 시야는 넓다. 비어 있는 공간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사라진 것들이 많다는 뜻일 것이다. 실제로 경희궁은 조선 후기의 중요한 궁궐이었음에도, 일제강점기와 근대화를 거치며 대부분의 전각이 훼손되거나 이전되었다.그래서 이곳은 완성된 풍경보다 여백이 먼저 눈에 들어.. 2026. 1. 19.
운현궁 탐방기 돌담 안쪽에서 만난 조용한 권력의 숨결 운현궁은 경복궁이나 창덕궁처럼 위풍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종로 한복판, 분주한 도로와 커피 향이 넘치는 골목 사이에 슬쩍 몸을 낮추고 앉아 있다. “나 여기 있어요”라고 외치지 않고, “알 사람은 알겠지요” 하고 조용히 눈을 맞추는 곳이다. 대문을 들어서기 전부터 마음이 조금 느려진다. 나이 탓일까, 아니면 이곳이 가진 공기의 밀도 때문일까.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짧아지고, 숨이 고른다.이곳은 흥선대원군의 사저이자 고종이 왕이 되기 전까지 살던 공간이다. 왕이 살던 궁궐이 아니라, 왕이 되기 전의 삶이 머물던 자리라는 점이 운현궁을 특별하게 만든다. 화려함보다는 준비의 시간, 권력보다는 기다림의 자세가 이곳의 바탕색이다. 그래서일까. 마당에 서 있으면 웅장.. 2026. 1. 12.
아침고요수목원 탐방기 꽃보다 먼저 마음이 피어나는 곳입구에서부터 마음이 느려지다 아침고요수목원의 문을 들어서는 순간, 발걸음이 저절로 느려졌다. 일부러 천천히 걷자고 다짐한 것도 아닌데, 몸이 먼저 안다. 이곳에서는 서두를 일이 없다는 것을. 도심에서는 늘 신호를 기다리고, 시간을 재고, 목적지를 계산하며 걷지만, 수목원의 길은 목적보다 과정이 앞선다. 어디까지 가야 한다는 표지보다,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지가 더 중요해진다. 입구를 지나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화려한 꽃이 아니라 나무였다. 그 나무는 굳이 말을 걸지 않는다. 다만 “괜찮다, 서둘지 않아도 된다”는 표정으로 서 있을 뿐이다. 꽃이 사람을 부르고, 사진을 찍게 만드는 존재라면, 나무는 사람을 멈추게 만든다. 그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르게 된다. 숨이 고르게 되면.. 2026. 1. 5.
바람의 혀와 돌담의 귀, 제주 옛이야기의 숨결을 걷다 제주라 하면 흔히 떠올리는 이미지가 있다. 푸른 바다, 솟아오른 한라산, 그리고 우뚝 선 돌하르방. 그러나 이 익숙한 풍경 뒤편, 혹은 그 익숙함 속 깊숙이 숨어있는 제주의 진짜 심장 박동을 느끼고 싶다면, 관광객의 북적거림을 잠시 뒤로하고 투박하게 쌓아 올린 검은 돌담이 끝없이 이어지는 옛길로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제주의 진정한 이야기는 시끌벅적한 관광지 대신, 이곳 돌담 사이를 휘감아 도는 바람의 속삭임과, 그 바람의 모든 것을 묵묵히 들어준 돌담의 귀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돌담길은 마치 시간의 터널과 같아서,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수백 년 제주의 삶과 지혜가 바람처럼, 혹은 돌멩이처럼 단단하게 다가온다. 그 길 위에서 우리는 비로소, 관광객이 아닌 여행자가 된다. 바람의 혀, 제주의 .. 2025. 12.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