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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5월의 바람은 나를 자꾸 옆길로 데려간다 -휘준-

by 휘준쭌 2025. 5. 21.

5월의 바람
5월의 바람은 자꾸 나를 딴 곳으로 데려 간다

5월의 바람은 묘한 힘이 있다.
창문을 반쯤 열어놓고 있으면,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와 나를 흔든다.

 

무언가를 하던 손이 멈추고, 나도 모르게 먼 산을 바라보게 된다.

바람이 어디서 불어왔는지는 모르겠는데, 마음 어딘가 깊은 곳을 스치고 지나간다.

 

오늘도 그랬다.
별다른 일도 없던 날이었다. 마요네즈가 다 떨어졌다는 아내의 말에 허리쌕 하나 차고 집을 나섰다.

그저 마트에 들렀다가 곧장 돌아올 생각이었다.

그런데 대문을 나서는 순간, 바람이 살짝 내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오래된 친구처럼, 아무 말 없이 슬쩍. 그래서 나는 방향을 틀었다.

마트 말고 전철역으로. 10분만 타면 아주 오래전에 살던 동네에 이른다.

 

내가 서른 즈음이었을까. 퇴근길마다 일부러 돌아 걷던 길이 아직도 있었다.

집에 빨리 가고는 싶었지만, 막상 문을 열면 아이 울음소리와 쌓인 빨래,

피곤한 아내의 얼굴이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가끔 그 길에서, 하루의 끝을 조금 늦췄다.
그땐 그렇게 걷는 게 ‘도망’ 같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숨 고르기’였던 것 같다.

 

한강변이었던 그 골목엔 벤치도 있다.
조금 낡았지만, 나보다야 낫다. 벤치에 앉아 잠깐 쉬는데, 갑자기 햇살이 따뜻하게 내려앉는다.

바람이 불고, 어딘가에서 누군가 웃는다. 아이 목소리다. 순간, 내 머릿속에 오래전 우리 아이들 모습이 겹쳐졌다.
작은 손으로 내 손을 잡고, “아빠, 이리 와봐요!” 하던 그때의 환한 얼굴.
세월은 참, 별안간 그렇게 찾아든다.

 

길 옆엔 새로 생긴 수제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었다.
쑥 맛이라니. 생소했지만, 뭔가에 이끌리듯 하나 사 들고 다시 벤치에 앉았다. 한입 베어무는 순간, 놀랐다.

혀끝에 닿은 건 단맛보다 기억이었다.


어릴 적 할머니가 해주시던 쑥떡의 그 향기.
어린 나는 양은 쟁반 위에 쑥을 얹고,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간식을 만들던 기억.

쑥 냄새 사이사이에 웃음과 땀과 사랑이 배어 있었던 시간.

 

그렇게 나는 마요네즈는 까맣게 잊고, 쑥향 품은 추억 한 봉지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여보, 마요네즈는?”
아내가 묻는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쑥 아이스크림을 건넨다.
“이게 더 급했어.”


아내는 처음엔 눈을 찌푸리더니, 아이스크림을 한입 먹고는 눈을 동그랗게 뜬다.
“어머, 이거… 쑥개떡 맛이네. 우리 어릴 때 먹던 거.”
그러더니 한참을 말없이 웃는다.

조용한 미소. 그게 좋다. 꼭 바람처럼. 가끔 생각한다.


좋은 길은 어디에 있나. 인생에서 정말 기억에 남는 길은,

계획해서 간 여행지보다, 그냥 마음 가는 대로 걷다 우연히 닿은 길이더라.
젊을 땐 앞만 보고 달렸다. 돌아보면 얼마나 많은 계절을 허겁지겁 지나쳤는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속도를 늦출 줄 아는 사람이 진짜 풍경을 보는 사람이라는 걸.

5월의 바람은 그걸 알려준다.
무언가를 하려 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걷기만 하면 된다.

 

발이 향하는 대로, 마음이 조금 느긋해지는 쪽으로. 오늘처럼.

요즘은 아내와 동네 공원을 자주 걷는다.
말을 많이 하진 않는다. 그저 바람소리 듣고, 꽃 한 송이 바라보고, 서로의 걸음에 맞춰 천천히 걷는다.

 

때로는 말없이 걷는 길이 더 깊은 대화가 되기도 한다.

5월은 누군가에게는 스승의 달, 가정의 달, 어린이날이지만, 우리 부부에겐 그냥 “함께 걷는 달”이다.

따로 뭔가 하지 않아도, 오래 함께 있으니 말 한마디 없이도 통한다. 바람결처럼 자연스럽게.

 

문득, 이런 생각도 든다.
앞으로 얼마나 더 이런 바람을 느낄 수 있을까. 몇 번의 5월을 더 이렇게 함께 걸을 수 있을까.
그 생각에 살짝 가슴이 조여 오지만, 그래서 오늘의 바람이 더 고맙다.

 

오늘, 바람은 또 나를 데려갔다.
익숙한 길 같지만, 오늘은 또 다른 감동이 숨어 있는 길.
지갑은 얇아도, 마음은 가득 차있다.


그리고 내 곁엔, 조용히 웃고 있는 사람이 늘 있다.

이만하면, 참 잘 산 하루다. 아니, 참 좋은 길을 걸은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