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세요?”
아침 식탁에서 아내가 물었다. 아내는 뭔가 기대에 찬 눈빛이었다. 나는 순간 땀이 났다.
“설마… 당신 생일? 아니지, 어버이날은 지났고, 스승의 날도 지났는데…”
“후후. 바로 ‘부・부・의・날’입니다!”
“그거 만든 사람이 아직도 부부일까…”
사실 난 부부의 날이 있는 줄도 몰랐다. 결혼기념일은 혼자 기억했다가 대여섯 번 까먹었고, 생일도 몇 번이나 깜빡했다. 그런데 아내는 유난히 이 날에 집착한다.
“우리 한강 한번 갈까요? 여유롭게 산책도 하고, 손도 잡고…”
“손은 안 놓고 살았는데 굳이 또 잡아야 하나?”
“이 양반, 낭만이 없어요. 나 오늘만큼은 ‘연애 시절 감성’으로 살 거예요.”
그리하여 우리는 한강으로 향했다. 아내는 운동화를 신고 나는 한물간 로퍼를 신었다. 옷장에서 찾아낸 연청색 바지를 입은 내 모습에 아내가 한마디 덧붙였다.
“만 나이로도 칠순이 넘었는데 아직 청바지 입은 남편, 그럭저럭 봐줄 만하네요?”
“그럼. 나 시니어 모델 될까 고민 중이야.”
“거긴 머리숱 심사도 있대요. 당신 다 좋은데 머리가 모자라요.”
"남들이 들으면 이상하게 생각하겠어, 돌대가리 말하는 줄 알잖아."
그렇게 우리는 과천에서 지하철을 타고 동작역에서 내렸다.
사실 백수 생활 10년째인데 서울 나올 일은 별로 없다. 대부분의 약속은 사당역에 잡히는데 그때를 빼곤. 서울보다 과천은 느긋해서 좋다. 바람도 부드럽고 사람도 한가롭다. 걸으면서 아내가 갑자기 내 팔짱을 낀다.
“여보, 옛날엔 이런 거 민망해서 잘 안 했죠?”
“지금도 민망해. 사람들이 ‘효심 깊은 딸’이라 착각하면 어떡해.”
내가 그렇게 젊게 보이냐며 아내는 깔깔 웃고, 나는 그 웃음에 묘하게 안심이 된다. 나란히 걷는 노부부의 뒷모습이 거울에 비치면, 마치 ‘세월이 만든 커플룩’ 같을까? 나도 모르게 물었다.
“여보, 당신 나랑 사는 거 후회 한 적 없어?”
“후회할 겨를도 없이 벌써 40년이 지났어요. 이제는 정들어서 못 떠나요.”
“무기징역 같은 거네.”
“가석방도 없어요.”
강변 벤치에 앉아 편의점 도시락을 꺼낸다. 아내가 미리 사온 김밥과 맥반석 달걀, 그리고 요구르트. 삼각김밥은 어디서 샀는지 매우 고급스럽다. 아주 작은 삼각 종이 박스에 담겼는데, 김을 전혀 만지지 않고도 먹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시니어 데이트의 3종 세트!”
“옛날엔 피자도 먹고 스파게티도 먹었는데…”
“그거 먹으면 이제는 속 쓰려요.”
우리는 음식을 나눠 먹고, 군밤 봉지를 놓고 가위바위보를 했다. 아내가 지면 치맥집 가기다.
군밤은 맥줏집 외부에서 반입한 플러스 안주다. 내가 이겼다. 아내는 투덜댄다.
“가위만 내는 거 반칙이에요.”
“그럼 주먹내면 되잖아, 한 번 더해볼까?"
산책을 마치고 이수역 쪽으로 장소를 옮겼다. 매머드 카페였는데 종이 팩 막걸리도 팔았다. 막걸리만 보면 나는 판단력을 잃는다. 아내는 라테를,, 나는 종이팩 막걸리를 주문했다. 계산은 내가 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경로우대는 내가 먼저다. 네 살 더 많으니까.”
나는 1월생이고 아내는 12월생이니, 다섯 살 차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부부의 날, 아내는 사진을 잔뜩 찍었다.
“이건 데이트 인증. 이건 사랑의 흔적. 이건 당신이 작가처럼 보이는 모습.”
그리고 사진 한 장엔 이런 글을 붙였다.
“#한강데이트 #부부의날 #이사람_아직도_내짝꿍”
돌아오는 길에 나는 사진 하나를 골라 손주에게 보냈다.
“할아버지는 오늘 할머니랑 손잡고 다녔단다. 너도 오래도록 이런 사랑하거라.”.”
손주는 답장을 보냈다.
“와우. 할아버지 대박. 요즘 말로 플렉스 하셨네요!”
부부의 날은, 사실 별거 없다. 거창한 이벤트도 없고 선물도 없다. 다만 둘이 나란히 걷고, 웃고, 샌드위치를 나눠 먹고, 서로의 어깨를 안아 보는 것. 어깨만 안아도 느낌이 시나브로 달라진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권해보는 자세다.
지금 이 나이에 연애를 한다는 건, 눈빛으로 설레는 게 아니라 서로의 관절 소리에 민감해지는 것이다.
"무릎 괜찮아?"
"당신 등 많이 펴졌네!"
어릴 때 등을 굽히는 운동(수영과 스케이팅)을 많이 해선지 요즘 굽은 등 펴겠다고 병원에 다녔었다. 그래서 아내의 ‘등 많이 펴졌네’는 사랑의 언어도 된다. 등이 펴지자 옷맵시도 나아지고 훨씬 살만하다. 붙이는 동영상은 벌써 재작년 것인데 등이 굽었을 때 찍은 것이다.
사실 우린 어느 지방엘 가거나 테니스장이 보이면 들어가 본다.
"서울에서 온 부부입니다, 한 게임해 주시죠."
공으로 보면 남자인 내가 조금 낫지만, 왕년의 아내는 이마추어 랭킹도 있었다. 여성이 잘 치는 혼복은 어디가나 게임이 되는 것이다. 아내의 구력은 남편의 어깨를 어디서나 올려준다. 재밌게 땀을 흘리고, 가지고 간 캔 맥주 한 잔씩하고 나오면 다음에 또 오시라는 인사가 정겹다. 그렇게 이러구러 저러구러 집으로 돌아오면 타닥타닥 불멍소리가 우리를 반긴다.
등산도 골프도 아니다. 다른 어떤 종목보다 둘이서 하나 돼야 할 수 있는 운동은 테니스 (그리고 딱 한 종목 더 ㅎㅎ) 뿐이라 생각한다. 다음 부부의 날도, 테니스는 계속되길 바란다. 장소와 목적지는 어디든 상관없다. 우리는 아직도 ‘데이트 중’이니까.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카네이션을 건네는 손엔 사연이 있다 (0) | 2025.05.26 |
---|---|
아아, 리어카와 그 때 그 감자 -휘준- (0) | 2025.05.23 |
5월의 바람은 나를 자꾸 옆길로 데려간다 -휘준- (0) | 2025.05.21 |
내 팬티를 벗긴 자, 그는 무죄인가 -휘준- (0) | 2025.05.20 |
화장실 낙서, 이쯤 되면 빌보드차트에 뜰라 -휘준- (0) | 2025.05.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