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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명수필

윤여선의 土曜斷想 '손수건은 푸른 해원을 향해 흔드는 깃발'

by 휘준쭌 2025. 5. 19.

제 183회

외출할 때 꼭 챙기는 것이 손수건입니다. 때로는 지갑이나 핸드폰보다 먼저 찾아 호주머니에 넣는 것이 손수건이지요.

간혹 실수로 손수건을 챙기지 못한 채 밖에 나서는 때가 있는데, 그때는 외출 시간 내내 쉽게 표현할 수 없는 허전함과 불안감을 느낍니다.

물론 재채기에 취약한  체질이라서 손수건을 챙기지 않으면 안되는 점도 있긴 하지만, 오래된 습관때문인지 손수건이 주머니 속에 꼭 들어 있어야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물품들의 중요성을 그것이 지니고 있는 물질적 가치로만 따진다면 손수건은 아마도 가장 아랫자리 저만치에 놓여 있을 것입니다. 하나의 천조각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세상의 모든 존재는 그것이 지니고 있는 물질적 가치의 크고 작음만으로 중요성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시장 아무데서나 얼마 안되는 돈으로 쉽게 살 수 있는 것이지만, 일단 '인연'을 맺게되면 하나의 '분신(分身)'처럼 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손수건이지요.

손수건이 주인을 위해 수행하는 역할이라는 것은 여느 물품들과 달리, 가장 '인격적'인 것들입니다.

인생의 여정을 함께 하면서 서로의 존재를 필요로 하고, 때때로 그 가치를 확인하면서 위안을 얻는 것이 손수건이라면 좀 과장된 표현일는지 모르겠습니다.

인생의 여로에서 삶에 지쳐, 남몰래 흐르는 동반자의 땀과 눈물을 자신의 몸을 적시고 더럽혀가며 밀착해 닦아 주는 존재는 손수건이 유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미처 알지 못해 위로해 줄 수 없는 동반자의 세세한 수고와  마음의 아픔을 가장 가까이에서 온 몸으로 보듬어 주는 손수건은 그런 의미에서 높이 존중받아야할 존재라 생각합니다.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영국의 '처칠 수상'이 국민들에게 호소했던 '피와 땀과 눈물'을 닦아 주었던 것도 수건이지요. 

손수건에 대해 남다른 생각을 갖게된 것은 아마도 사춘기 때 보았던 어느 한 손수건에 대한 기억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시골에서 살던 청소년 시절 처음으로 서울에 올라 와 친구 집에서 며칠동안 유숙한 적이 있었지요.

그때 그 친구가 보여준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눈물에 젖어 심하게 얼룩진 편지와 손수건이었습니다.

친구 말로는, 그의 누나를 짝사랑했던 어느 청년이 결국 사랑을 얻지 못한 채 마지막으로 밤새워 울면서 써서 보내온 편지와 손수건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눈물로 짙게 얼룩져 뻣뻣해진 손수건과 편지는 보는 사람의 마음을 무척 아프게 했습니다.

어찌된 영문인지 그의 누나는 그 청년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면서도 그 편지와 손수건은 버리지 않고 오랫동안 보관해 오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의 누나는 아마도 그 편지와 손수건을 자신의 아름다운 청춘을 기억하기 위한 기념물 정도로 여기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동생들한테 자랑하며 마음대로 볼 수 있도록 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친구의 누나는 그 당시에 결혼하지 않고 회사에 다니고 있었는데, 그토록 절실했던 그 사람의 사랑을 왜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하는 궁금증이 그 뒤로도 한동안 마음 속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그의 누나를 다시 민나면 추억담처럼 그 의문을 꺼내 풀어봐도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쉽게도 그 기회는 다시 오지 않았습니다. 

그 친구가 일찍 세상을 떠나, 그의 누나를 만날 기회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지요. 그 친구가 세상을 떠나던 날 장례식장에서 그의 누님을 만나기는 했었지만, 슬픔에 잠긴 이에게 꺼낼 수 있는 질문은 아니었지요.

친구 집에서 눈물 젖은 편지와 손수건을 보았던 그 무렵에는 <하얀 손수건>이란 노래가 유행중이었습니다. 

"헤어지자 보내 온 그녀의 편지 속에/ 곱게 접어 함께 부친 하얀 손수건/ 고향을 떠나 올 때 언덕에 홀로 서서/ 눈물로 흔들어 주던 하얀 손수건/ 그때의 눈물 자위 사라져 버리고/ 흐르는 내 눈물이 그 위를 적시나."

이는 원래 그리이스 가수 '나나 무스쿠리'가 부르고, 우리나라의 '트윈 폴리오'가 새롭게 번안해 부른 노래인데, 군 복무 시절 기타를 치며 내무반에서 불렀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습니다.

이렇듯 손수건은 여러 차원에서 인간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곤 합니다. 특히 만남보다는 헤어짐, 그리고 행복보다는 고난과 슬픔의 위무(慰撫) 차원에서 말이지요.

대부분 소소한 영향에 그치곤 합니다만, 인생 전반을 뒤집어 엎기도 하는 것이 손수건이기도 하지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연극 <오셀로>에서처럼 말입니다.

'오셀로'는 흑.백 혼혈의 '무어인'이었으면서도 능력이 뛰어난 장군으로서 한 도시를 지배하는 총독이었지요. 그의 아내 '데스데모나'는 뛰어난 미모를 지닌 백인이었습니다.

이 둘 사이를 가르고, 오셀로가 아내 데스데모나를 죽이게 한 것은, 승진에 불만을 품었던 부하 '이아고'가 꾸민 '손수건 사건'이었습니다.

이아고는 오셀로가 데스데모나에게 선물했던 손수건을 훔쳐 그의 라이벌 '캐시오'의 방에서 발견되게 함으로써 오셀로로 하여금 아내의 정절을 의심케 해 그녀를 죽이고, 오셀로 자신도 자결케 합니다.

이와 같이 손수건은 아름답고 로맨틱한 작은 사랑 이야기의 미풍으로부터, 연극 <오셀로>처럼 인간의 운명을 뒤엎을 수도 있는 폭풍우 역할도 수행합니다. 

그래서 손수건은 하나의 작은 신변용품으로서만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의 끝까지 함께 해야 할 중요한 '동반자'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해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 유치환, <깃발>

손수건은 아마도 인간 내면의 깊숙한 곳으로부터 본원적인 '향수(鄕愁)'를 불러 일으키는 영원의 존재가 아닐까 싶습니다. 푸른 해원을 향해 나부끼는 '깃발'처럼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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