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46 새벽 비속 오색에서 대청올라 백담까지 설렘은 짙은 어두움에서어둠이 세상의 모든 윤곽을 삼켜버린 2025년 10월 15일 새벽 세 시, 저는 설악산 오색약수터 입구에 섰습니다. 작년 칠순기념산행으로 두 번 올랐던 산인데도 자연이 주는 숭고함 앞에서는 언제나 소년처럼 설레고, 때로는 미지의 두려움에 잠시 숙연해지곤 합니다. 이날의 설렘은 짙은 어둠만큼이나 깊었습니다. 희미한 헤드랜턴 불빛에 의지해야만 겨우 한 발자국을 내디딜 수 있는 칠흑 같은 밤, 하늘에서는 미세한 부슬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빗줄기가 아니었습니다. 존재의 미미함을 깨닫게 하는 서늘한 침묵이자, 동시에 산이 제게 건네는 묵직한 환영의 인사이기도 했습니다. 오색에서 대청봉으로 향하는 오르막길은 익히 알던 것보다 훨씬 가파르고 길게 느껴졌습니다. 빗물에 젖어 미끄러.. 2025. 10. 19. 한탄강 주상절리길, 내 인생의 '수작' 한편 -휘준- 어느 멀쩡한 날 오후, TV 화면 속을 유영하던 철원 한탄강 주상절리길의 비경이 마음 깊이 들어왔습니다. 검푸른 현무암 기둥들이 켜켜이 솟아오른 모습은 마치 자연이 빚어낸 거대한 병풍 같았어요. 3.6 km의 잔도길, 짧은 길은 아니었기에 "70이 넘었으니 나도 노인인데 저런 아찔한 길을 꼭 가야 하나?" 잠시 머릿속에 티격태격이 일었지만, 이내 마음속에선"아니, 지금 아니면 언제 또 해보겠어!" 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짧은 고민 끝에,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는 새로운 모험을 떠나는 여행자의 심정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편안한 신발 끈을 고쳐 매고, 가벼운 배낭을 멘 채 설렘 반, 긴장 반으로 길을 나선 그날의 아침은 꽤나 상쾌했습니다.드르니 마을 매표소를 지나 순담으로 향하는 잔도 길, 첫발을 내.. 2025. 9. 24. 거슨세미오름, 숲길이 들려주는 느린 노래 첫발을 디딘 오름의 고요 제주에는 수많은 오름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거슨세미오름은 조금 특별하다. 화려한 관광지가 아니고, 유명세를 떨치는 오름도 아니어서 더욱 조용하다. 오름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느껴지는 것은 사람보다 숲의 기운이 먼저라는 사실이다. 바람은 천천히 불고, 길은 완만하게 이어진다. 가파른 경사가 없어 누구든 부담 없이 오를 수 있다. 제주 사람들에게 오름은 생활 속 풍경이지만, 여행객에게는 늘 새롭다. 나 역시 수많은 오름을 올랐지만, 거슨세미오름은 첫발부터 남다른 편안함을 건네왔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벗이 조용히 손을 내밀어주는 듯했다. 길 옆에는 편백과 삼나무가 곧게 뻗어 서 있다. 나무들은 서로 경쟁하지 않고 나란히 자라며 숲을 이룬다. 햇빛은 나뭇잎 사이로 스며들어 반.. 2025. 9. 10. 숲을 달리는 기차, 에코랜드에서의 하루 제주 여행의 매력은 계절마다 다르게 다가온다. 봄에는 유채꽃이 들판을 덮고, 여름에는 푸른 바다와 파도가 청량함을 선사한다. 가을로 접어드는 9월, 제주는 바람이 한결 선선해지고 하늘빛이 유난히 맑아진다. 이 시기에 꼭 추천하고 싶은 여행지가 있으니, 바로 조천읍 교래리에 위치한 에코랜드 테마파크다. ‘테마파크’라는 이름이 붙어 있어서 잠시 놀이기구가 즐비한 곳을 상상했지만, 실제로 마주한 풍경은 전혀 달랐다. 이곳은 곶자왈 숲을 누비는 기차 여행을 중심으로, 자연과 하나 되는 체험이 펼쳐지는 공간이었다.기차를 타고 떠나는 숲 속 여행 에코랜드의 상징은 단연 붉은색 기차다. 19세기 증기 기관차를 모델로 한 영국식 기차가 천천히 레일 위를 달린다. 승강장에서 기차가 들어올 때면,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까.. 2025. 9. 9. 현실을 벗어난 착시 세계, ‘박물관은 살아있다’에서의 하루 제주도 여행은 언제나 자연과의 만남으로 가득하다.푸른 바다의 수평선, 바람 따라 흔들리는 억새밭, 돌담 위로 노니는 새 그림자, 그리고 정갈하게 뻗은 한라산 능선까지. 그 모든 풍경은 마음을 정화해주지만, 여행 중에는 문득 자연을 잠시 벗어나 전혀 다른 세계를 경험하고 싶을 때가 찾아온다. 마치 매일 먹던 된장찌개 대신, 하루쯤은 짜장면을 시켜 먹고 싶은 심정과 비슷하다. 이번 여행에서 나와 아내가 선택한 ‘짜장면 같은 하루’의 목적지는 바로 중문관광단지에 있는 ‘박물관은 살아있다(Alive Museum)’였다. 이름부터 ‘이 박물관이 정말 살아 움직인단 말인가?’ 하는 의문을 품게 만든다. 처음 만난 ‘움직이는’ 박물관 중문관광단지 초입으로 들어서면 리조트와 호텔이 길게 늘어서 있어 관광지 분위기가 물.. 2025. 9. 9. 바람, 돌, 그리고 여름 : 제주에 스며든 시간 -휘주니- 8월의 바람, 스쳐간 세월의 숨결 제주의 8월, 섬은 온통 생명의 초록으로 뒤덮여 활기로 가득하다. 하지만 내게 제주의 여름은 늘 바람으로 시작되고 바람으로 끝난다. 공항을 나서자마자 훅 끼쳐오는 습하고 더운 공기, 그리고 그 속을 휘젓는 바람. 그 바람은 육지의 것과는 다르다. 단순히 시원함만을 주는 것이 아니라, 대지를 휘감고 온 바다를 건너오며 수많은 이야기를 싣고 오는 듯하다.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에 귀 기울이다 보면, 지난 세월의 소곤거림이 들려오는 착각마저 든다. 8월의 제주는 뜨겁지만, 그 더위를 식히는 것은 바로 이 바람이다. 한라산 능선을 타고 흘러내려오는 바람은 땀에 젖은 이마를 부드럽게 쓰다듬고, 바닷가 모래밭을 가로지르는 바람은 지친 몸을 위로한다. 바람은 형태도 없고 잡히지도 .. 2025. 9. 4. 이전 1 2 3 4 5 6 7 8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