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34 그믐달 -나도향- 나는 그믐날을 몹시 사랑한다. 그믐날은 요염하여 감히 손을 댈 수도 없고, 말을 붙일 수도 없이 깜찍하게 예쁜 계집 같은 달인 동시에 가슴이 저리고 쓰리도록 가련한 달이다. 서산 위에 잠깐 나타났다 숨어버리는 초승달은 세상을 후려 삼키려는 독부(毒婦)가 아니면 철모르는 처녀 같은 달이지마는, 그믐달은 세상의 갖은 풍상을 다 겪고, 나중에는 그 무슨 원한을 품고서 애처롭게 쓰러지는 원부(怨婦)와 같이 애절하고 애절한 맛이 있다. 보름의 둥근 달은 모든 영화와 끝없는 숭배를 받는 여왕(女王)과 같은 달이지마는, 그믐달은 애인을 잃고 쫓겨남을 당한 공주와 같은 달이다. 초승달이나 보름달은 보는 이가 많지마는, 그믐달은 보는 이가 적어 그만큼 외로운 달이다. 객창한등(客窓寒燈)에 정든 임 그리워 잠 못 들어 하.. 2025. 3. 16. (11) 하얗게 잊었던 하얀 기억 '셋' -휘준- 우리는 쥐를 싫어한다. 아니 좋아하는 사람이 어딨을까? 그러나 학교마다 통일된 숙제가 ‘쥐꼬리 잘라 오기’인 날이 기억난다. 전국적으로 벌어진 쥐 잡기 행사(?). 잡은 증거로 그 꼬리들을 잘라 와야 했고 그 실적은 반별로 경쟁이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망측하기도 했지만 엄연한 사실 아닌가. 잊혀진 일은 또 있다. 당시 거리에 있는 화장실엘 들어가려면 돈을 내야 했다. 돈 없으면 화장실도 못 가느냐고 요즘 아이들은 묻겠지만 답은 엄연히 '그랬다.' 아닌가. 버스터미널의 화장실도 유료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화장실 직원이 대변이냐 소변이냐를 물어 요금을 달리 받았는데, 소변 요금 내고 들어가 대변 칸으로 건너가다 걸리면 창피를 당하기도 했지 않은가. 어쨌든 화장실 앞에서 돈이 없어 쩔쩔매던 .. 2025. 3. 15. (10) 조선어학회와 일본놈학회에 낑긴 걸레통 -휘준- 우리 고교 졸업한 지도 벌써 50년이 넘었죠? 아득한 옛날인데도 선생님 중에는 요즘에 뵌 분같이 낯설지 않은 분도 계십니다. 그중 교실에 들어오시자마자 칠판으로 돌아서서 판서부터 하는 선생님이 생각납니다.. 들어오시면 인사부터 받고 시작하는 관습까지 잊으신 겁니다. 정년이 가까우신 할아버지 선생님은 노망끼가 조금 있었으나 판서 솜씨는 일품이셨습니다.. 20분쯤 쓰고 돌아서서 "빨리 베껴!" 하시곤 손가락의 분필 가루를 입으로 요리조리 불면서 5분 더 기다려 주시고 5분쯤 설명하시던 선생님. 그렇게 두 번 하다 종이 울리면 또 인사도 안 받고 그냥 사라지던 선생님. 어떤 땐 환청으로 들으신 양 종소리도 없었는데 그냥 나가시는 날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쉬는 시간이 늘어나 마냥 좋았습니다. 그 선.. 2025. 3. 14. (9) 학교 수돗가에서 홀딱 벗고 씻던 우리들 -휘준- 고교 2학년이 된다는 건 매우 즐거운 일. 득실거리던 선배들 절반이 떠나고 그만큼 새로 생긴 후배들 앞에서 꺼벙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2학년이 된 때, 우리에겐 커다란 혼란이 두 가지 있었다. 첫 번째는 닉슨이 중공을 방문해서 공산 맹주 모택동을 찾은 사건이다. 닉슨과 주은래의 사진도 연일 매스컴에 떠서 우방들이 혼란에 싸였는데, 우리의 경우 고교입시 때 동점자는 반공도덕 성적순으로 뽑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요즘 같으면 입시요강 바꾸라고 난리 나지 않았겠나. 반공이 모든 걸 이기던 시대였으니 중국에 간 닉슨은 충격 그 자체였다. 두 번째는 3월부터 목욕탕 요금이 62.5%나 오른 것이었다. 물론 이 변화를 사회적 혼란으로 보기엔 다분히 주관적이지만, 한꺼번에 올린 인상 폭이 62.5% 얼마.. 2025. 3. 13. 나는 허수아비 진짜 허수아비 -휘준- © mosayyebnezhad, 출처 Unsplash허수아비 /휘준 "오케바리?"전철에 막 오르려는데 누가 귀에다 소리를 버럭 질렀다. 깜짝 놀라 쳐다보니 문간에 선 한 청년이 핸드폰을 받고 있었고 내 귀가 그의 입을 스친 꼴이었다. 문이 닫히자 차내가 조용해지고 그의 목소리도 줄어들었다. 그는 제 친구와 약속 장소를 정하는 모양인데 '찾아올 수 있겠지?'라는 뜻으로 그 말을 외쳤던 것이다.그놈의 "오케바리?"외모도 준수한 청년이 여자친구의 머리칼을 연신 쓰다듬으며 말끝마다 ‘오케바리?’를 연발했다. 주위의 눈총도 모르는 체 상스러운 말투로 전화에 열중하고 있는 젊은이 둘은 흔한 말대로 '한 쌍의 바퀴벌레' 같았다. 전철이 서고 문이 열리자 소음이 커지고 그의 목소리도 다시 커졌다. "XX놈아 앞대가리.. 2025. 3. 12. (8) 개나 소나 다 모범생인 세상은 -휘준- 개나 소나 다 모범생인 세상은 개나 소, 걔들도 재미없어 싫어한다.공부 꼴찌인 나도 그들이 싫어 학교 담을 넘어 전국체전에 나갔는데, 촌놈이 금메달을 땄다.30년 후 sbs 방송 공모에 응했다가 수영선수의 글이 재밌다고 뽑혔다. 'sbs 아빠의 도전’ 여기엔 응모자가 많아 사연이 재밌어야 뽑힌다.한 가족이 25분간 TV에 나오는 행운.온 가족이 1분만 TV에 나와도 동네방네 자랑하던 때가 아닌가.방송국 PD가 일주일 내내 집으로 출근, 도전과제는 달걀을 던져 올려 사각 쇠주걱으로 10번 받아내기. PD는 아빠 수영 모습을 꼭 찍어야 한다고 우겼다.잘 찍어주겠다던 꼬임에 빠져, 풀장에 끌려가 주종목도 아닌 버터플라이를 해보다.늘어난 뱃살에 허리 피칭이 안되어 죽을 뻔, ‘수영선수 익사하다’라는 기사가 나갈.. 2025. 3. 11. 이전 1 2 3 4 5 6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