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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명수필

윤여선의 土曜斷想: 배론 성지의 토굴과 백서

by 휘준쭌 2025. 6. 15.

[토요 단상(土曜斷想)] (2025.06.14.)
========{제 188회}========

 

고향집 뒷산 계곡에는 큰 토굴(土窟)이 하나 있었습니다. 어른들 말씀으로는 6.25 전쟁 때 동란을 피하기 위해 동네 사람들이 파놓았던 굴이라 했지요.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그 토굴은 폐쇄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어, 우리 개구쟁이들의 놀이터나 쉼터가 되곤 했습니다.

그 안에 들어가 누우면 땅 깊은 곳으로부터 미세한 울림이 들려오는 것 같기도 하고, 더운 여름에도 어딘가로부터 바람이 스며들어 오는 듯한 시원함이 느껴졌습니다.

 

개구쟁이들은 이 굴에 만족지 않고 계곡 위로 좀 더 올라가 골짜기의 단단한 흙벽을 파내어 또 다른 토굴을 만들었지요.

그 굴은 어른들이 알지 못하는 우리들만의 피난처가 되어, 혼날 짓을 저지르고 숨는다든지, 산에서 힘든 일을 하다 도망쳐 들어가 쉬는 장소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땅 속의 굴은 즐겁고 행복한 사람들보다는, 무언가에 쫓기거나 불안한 상황으로부터 도피해 숨어드는 사람들이 주로 찾는 곳이지요.


지난달 마지막 주일에 우리 성당 신자 5백여 명은 '본당의 날'을 기념하기 위해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순례지는 충북 제천의 '배론 성지'였지요.

 

계곡이 배의 밑창을 닮았다 해서 '배론(舟論)'이라 불려 왔는데, 우리나라 천주교 역사에서 두 번째로 탄생한 사제인 최양업 신부의 묘소를 비롯한 천주교 유적들이 많이 있는 곳입니다.

 

이전에도 수차례 다녀온 적이 있는데, 그곳에 갈 때마다 빼놓지 않고 돌아보는 곳은 '황사영(黃嗣永)' 선조(先祖)가 '백서(帛書)'를 썼던 토굴입니다. 지금은 실내 공기도 잘 조절되고 조명도 밝지만, 처음 토굴을 팠을 때에는 모든 상황이 매우 열악했을 것임은 쉽게 추측할 수 있지요.

황사영이 사용한 토굴은 아님
황사영이 숨었던 토굴은 아님(이미지 사용)


황사영 선조가 이 토굴로 숨어 들어온 것은, 1801년, 당시 정순왕후가 수렴청정하던 조정에 의하여 천주교인 100명이 처형되고 400명이 유배당한, 소위 신유년의 천주교 박해가 한창 진행 중인 때였지요. 황사영은 수개월동안 이 토굴 속에 숨어 지내면서, 당시 조선의 천주교가 처해 있는 어려운 상황에 대해 소상히 적어 내려갑니다.

 

가로 62센티, 세로 38센티의 흰 비단[帛]에 122행 13,384자의 작은 한문 글씨로 깨알같이 써 내려간 내용은, 당시의 조선 조정의 천주교에 대한 박해 상황, 천주교 중요 인물들의 활동 내용, 그리고 어려움을 헤쳐나가기 위한 도움 요청등이었지요.

 

당시의 어려운 상황과 지도자급 신자들의 활동에 대한 소상한 기술은 오늘날 천주교 역사 연구에 큰 도움을 주는 유익한 내용들이지만, 지금도 문제가 되는 것은, 당시의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중국 북경 교구장 '구베아' 주교(主敎)에게 요청한 내용들입니다.

 

문제가 되는 백서의 일부 내용입니다.

"이 나라의 병력은 본래 가냘프고 약해서 모든 나라 가운데 제일 끝인 데다가 이제 태평한 세월을 2백 년간이나 계속해 왔으므로 백성들은 군대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위로는 뛰어난 임금이 없고, 아래에는 어진 신하가 없어서 자칫 불행한 일이 있기만 하면 흙더미처럼 와르르 무너져 버리고, 기왓장처럼 부서질 것이 틀림없습니다.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전선 수백 척과 정병 5,6 만을 얻어 대포 등 날카로운 무기를 많이 싣고, 겸하여 글 잘하고 사리에 밝은 중국 선비 서너 명을 데리고 바로 이 나라 해변에 이르러 국왕에게 글을 보내어, 우리는 서양의 전교하는 배요, 자녀나 재물 때문에 온 것이 아니라 교황의 명령을 받아 이 지역의 생령을 구원하려 온 것이오 (라고 해주십시오)."

 

서양의 전함(戰艦) 수 백 척과 정병 5, 6만 명을 이끌고 와 중국 선비 서너 명으로 하여금 통역토록 하여 정부가 천주교를 받아들이도록 위협해 달라는 것이었지요.

 

조선을 청나라의 한 성(省)으로 편입시켜 천주교를 받아들이도록 청나라 정부에 압력을 넣어 달라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이 모든 내용들은 백서를 소지하고 국경을 넘던 분이 체포되어 낱낱이 밝혀짐으로써 황사영 선조를 비롯한 모든 관련자가 처형 또는 유배되고, 정부의 천주교 신자 탄압을 강화하는 빌미를 제공해 주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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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론 성지의 황사영 선조가 머물렀던 토굴을 둘러볼 때면, 떠오르는 여러 상념들로 머릿속이 복잡해집니다.

먼저, 흐릿한 등잔불을 벗 삼아 본인의 경험과 기억들을 되살려가며 그토록 방대한 양의 글을 써 내려간 26세 청년의 외로운 모습이 그려지고, 마음속에 떠오르는 흐릿한 실루엣을 통해 전해지는 그의 분노와 절망과 슬픔을 느끼지요.

 

다른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어린 나이에 진사(眞士)에 합격한 명석한 두뇌로 청운의 꿈을 맘껏 펼쳤을 사람이, 토굴 속에 숨어 외세의 도움을 구걸하는 반역의 글을 쓸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현실이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물론 그의 천국을 향한 소망이 세속적인 부귀영화와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가치를 지닌 것이라 할지라도, 천국에 이르기 위해 조국을 배신해야만 했던 상황 판단의 오류가 가슴 아픈 것이지요.


2백 년 전의 황사영 선조의 생각과 행위가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더욱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 당시의 많은 순교자 분들이 성인(聖人) 품위에 오른 반면, 황사영 선조가 성인으로서의 모든 조건을 갖추었음에도 아직껏 '복자(福者)' 품위에 조차 오르지 못하고 '가경자(可敬者)'에 머물러 있는 것은 그 백서의 내용 때문이지요.

 

세상에서의 가치는 세월의 흐름과 상황의 변화에 따라 그 기준이 달리 적용될 수 있는 것임에도, 황사영 선조의 경우 2백 년 넘는 동안 아무런 변화 없이 똑같은 기준이 적용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사실입니다.

 

그분이 혼신을 다해 썼던 백서는, 그 당시 실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또한 현실적으로 이루어질 수도 없는, 한 열렬한 젊은 천주교 신자의 분노의 기록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는데도 말이지요.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윤여선/관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