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46 운현궁 탐방기 돌담 안쪽에서 만난 조용한 권력의 숨결 운현궁은 경복궁이나 창덕궁처럼 위풍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종로 한복판, 분주한 도로와 커피 향이 넘치는 골목 사이에 슬쩍 몸을 낮추고 앉아 있다. “나 여기 있어요”라고 외치지 않고, “알 사람은 알겠지요” 하고 조용히 눈을 맞추는 곳이다. 대문을 들어서기 전부터 마음이 조금 느려진다. 나이 탓일까, 아니면 이곳이 가진 공기의 밀도 때문일까.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짧아지고, 숨이 고른다.이곳은 흥선대원군의 사저이자 고종이 왕이 되기 전까지 살던 공간이다. 왕이 살던 궁궐이 아니라, 왕이 되기 전의 삶이 머물던 자리라는 점이 운현궁을 특별하게 만든다. 화려함보다는 준비의 시간, 권력보다는 기다림의 자세가 이곳의 바탕색이다. 그래서일까. 마당에 서 있으면 웅장.. 2026. 1. 12. 아침고요수목원 탐방기 꽃보다 먼저 마음이 피어나는 곳입구에서부터 마음이 느려지다 아침고요수목원의 문을 들어서는 순간, 발걸음이 저절로 느려졌다. 일부러 천천히 걷자고 다짐한 것도 아닌데, 몸이 먼저 안다. 이곳에서는 서두를 일이 없다는 것을. 도심에서는 늘 신호를 기다리고, 시간을 재고, 목적지를 계산하며 걷지만, 수목원의 길은 목적보다 과정이 앞선다. 어디까지 가야 한다는 표지보다,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지가 더 중요해진다. 입구를 지나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화려한 꽃이 아니라 나무였다. 그 나무는 굳이 말을 걸지 않는다. 다만 “괜찮다, 서둘지 않아도 된다”는 표정으로 서 있을 뿐이다. 꽃이 사람을 부르고, 사진을 찍게 만드는 존재라면, 나무는 사람을 멈추게 만든다. 그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르게 된다. 숨이 고르게 되면.. 2026. 1. 5. 아직, 마음은 접지 않는다는 것 낙엽처럼 흔들리되, 머무를 줄도 알게 되어 만족한 나뭇잎. 그래 나뭇잎처럼 살자. 결정을 미루는 데에도 나름의 질서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무 생각 없이 망설이는 게 아니라, 하루하루를 살아보며 조금씩 저울에 올려보는 방식이다. 이건 저쪽이 낫고 저건 이쪽이 낫고. 제주에 갈 것인가, 남을 것인가라는 답변도 이제는 급하지 않다. 당장 답하지 않아도 되는 질문을 하나쯤 품고 사는 것도 좋지 않으랴. 사람들과의 관계, 익숙한 일상, 섬에서 배운 느린 속도와 여유. 모든 것이 함께 흔들리며 내 안에서 자리 잡는다. 나이가 들수록 선택지는 줄어들겠지만, 선택을 대하는 태도는 더 신중해졌음을 느낀다. 아침에 일어나 창밖을 보면 제주에서 보던 하늘이 떠오르기도 한다. 색이 아주 비슷한 날이 있다. 그런 날이면.. 2025. 12. 31. 지금 이만하면 충분하지만, 그 여학생을 꼭 찾고 싶다 길가에 떨어진 낙엽이나 한라산을 구르는 낙엽이나 똑같을까? 제주로 이사를 갈 것인가 말 것인가. 이 도시를 떠날 것인가 말 것인가. 그 결론을 지금은 내리지 않기로 했다. 마음 한켠에 섬이 남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지금의 나에게는 이미 하나의 답처럼 느껴진다. 아침에 눈을 뜨면 여전히 익숙한 풍경. 오래 살아온 동네의 숨소리 같은 것, 늘 지나던 길, 안부를 묻지 않아도 서로의 안색을 살피는 사람들. 특별할 것 없는 이 일상이 예전보다 더 또렷하게 다가온다. 떠나지 않았기에 익숙해진 장면들이다. 얼마 전 동네 마트에서 귤을 고르다 잠시 웃었다. 제주 귤이었다. 예전 같으면 산지부터 따졌을 텐데(우리나라 귤 산지는 다양하다. 완주 삼천포귤, 영덕 세계귤, 천안 타조귤, 낙서리 감귤, 대관령과 전북 진안의 .. 2025. 12. 30. 제주가 아닌 곳에서 써먹는 제주식 삶 제주에서 돌아온 뒤, 가장 먼저 달라진 것은 생활이 아니라 마음의 속도였다. 여전히 같은 동네를 걷고, 같은 사람들을 만나고, 같은 집으로 돌아오지만, 예전처럼 하루를 꽉 채워 써야 한다는 조급함은 분명히 줄었다. 제주에 살지 않더라도, 제주에서 배운 방식으로 사는 건 가능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제주가 아닌 곳에서? 제주가 아닌 곳을 그들은 '육지'라고 불렀다. 육지인도 제주도민이 되면 몇 가지 이점이 주어졌다. 그중 제일 큰 것이 경로우대 버스카드로서, 일반버스는 어디를 가나 하루 몇 번을 타든 공짜였다. 그래서 냉큼 옮기고 룰루랄라 있는데 도청에서 쪽지가 왔다. '차고지 증명을 제출하시오.' "작은 하숙집에 주차장은 없고, 나는 혼자 여행 온 것입니다.""차가 지금 육지에 있다는 사진을 제출하시면 .. 2025. 12. 29. 섬에 마음을 두고, 아직은 친구들 곁에 산다 제주엔 세 달 살아봤다. 처음 오래 머문 것은 작년, 한 달 살아보겠다고 섬에 들어갔지만, 사실은 ‘살아본다’기보다 ‘지켜본다’에 가까웠다.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곳에 몸을 맡긴다는 건 설렘보다 조심스러움이 먼저 온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몸이 어디쯤 와 있는지, 마음은 또 어디에 남아 있는지부터 살핀다. 창을 열면 바람이 먼저 들어왔다. 젊었을 땐 바람을 배경으로 여겼지만, 이제는 대화 상대로 느껴진다. 오늘은 세구나, 오늘은 오래 머무는구나. 바람이 그러면 나도 그 속도를 따른다. 제주에서는 그게 가능했다. 올해는 두 달을 살았다. 한 달과 두 달의 차이는 크다. 한 달은 낯섦으로 버틸 수 있지만, 두 달부터는 생활이 말을 걸어온다. 병원이 어디 있는지, 비 오는 날 미끄러운 길은 어떤지, 겨울을 .. 2025. 12. 28. 이전 1 2 3 4 ··· 8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