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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니스 코트 위의 가족 전쟁 작년과 올해 나는 거침없이 다녔다. 작년엔 칠순기념 산행 10곳, 올해도 백록담 3번, 백운대와 대청봉 1번씩. 어디를 가도 7학년은 만나지 못했다. 그런데 거침없던 나에게 큰 거침이 생겼다. 아내다. 잘 달리던 내가 아내가 걸어오는 딴지에 꼼짝 못 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 주 토요일, 운명의 대결이 있다. 상대는 다름 아닌 아들과 며느리. 테니스 경기인데 내기의 크기는 100만원쯤 걸린 것이다. 아들아이가 여행 2박 3일 같이 갑시다며 내기를 건 것이다. 이름은 경주 APEC 뒤땅밟기. 여행 경비 전액이 걸린 ‘세대 간 혼합복식'을 치뤄야 하는데 아내가 말을 안 듣는다. 아들은 테니스 선수였다. 그런 아들과 맞붙으려면 며느리 쪽을 주로 공격해서, 아들아이가 무리한 커버 플레이를 하게끔 해야 실수가 나.. 2025. 11. 5.
휴애리 자연생활공원, 가을 산책의 핑크빛 초대장 제주 남원에 자리한 휴애리 자연생활공원은 이름부터가 범상치 않다. ‘휴(休)’는 쉼이요, ‘애리(愛里)’는 사랑의 마을이라니, 이보다 따뜻한 초대장이 있을까. 이름만 들어도 벌써 벤치에 앉아 쉬고 싶은 기분이 드는데, 9월의 휴애리는 그야말로 계절의 화원, 아니, 가을 풍경의 종합선물세트다. 코스모스가 바람에 설레고, 핑크뮬리가 분홍빛 연기를 피워 올리며, 방문객들의 마음은 어느새 동심으로 회귀한다. 이쯤 되면 ‘공원 산책은 무료로 받는 심리치료’라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코스모스, 가을의 손편지  휴애리를 찾는 9월의 첫인상은 단연 코스모스다. 길가와 정원마다 심어놓은 코스모스가 바람에 흔들릴 때면, 마치 누군가 오래된 편지지에 꾹꾹 눌러쓴 가을의 편지를 받아 드는 기분이 된다. 꽃잎은 얇지만 그 속에.. 2025. 11. 4.
가시리 녹산로 & 따라비 오름, 억새의 파도와 가을의 전망대 제주 동쪽 남원과 표선을 잇는 가시리 녹산로는 가을이 되면 ‘억새의 왕국’으로 변신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 도로 양옆으로 억새가 하얀 파도를 이루며 흔들리고, 그 길 끝에는 소박하면서도 매혹적인 따라비 오름이 우뚝 서 있다. 누군가는 이 길을 ‘억새 고속도로’라 부르고, 또 다른 이는 ‘가을의 대형 카펫’이라 한다. 어떤 이름을 붙이든 상관없다. 그저 가을 바람에 스치는 억새의 물결을 따라가다 보면, 마음까지도 하얗게 씻기는 듯하다. 녹산로, 억새의 바다 위를 달리다  9월 말이 되면 가시리 녹산로는 차창을 열고 달리기만 해도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느껴진다. 길 양옆의 억새가 바람에 일제히 고개를 흔들면, 마치 ‘어서 와, 가을 여행자!’ 하고 환영 인사를 건네는 듯하다. 햇살에 비친 억새의 은빛은 고급.. 2025. 10. 31.
중문 색달해변, 파도와 사람 그리고 한 접시의 바다 계절 따라 달라지는 색달해변의 표정  제주 중문 색달해변은 계절마다 다른 표정을 보여주는 해변이다. 여름 성수기에는 해수욕을 즐기려는 여행객들로 북적이며, 아이들이 튜브를 끌고 파도에 몸을 맡긴다. 9월 초까지는 여전히 바다에 몸을 담글 수 있어, 물놀이를 즐기는 이들의 웃음소리가 해변을 가득 채운다. 뜨거운 햇볕에 모래사장은 금빛으로 반짝이고, 파도는 장난기 어린 아이처럼 가볍게 사람들을 밀어낸다. 해변 입구에는 차양막과 파라솔이 늘어서고, 여름의 열기는 그곳에서 절정을 이룬다.  하지만 9월 중순이 넘어가면 분위기는 사뭇 달라진다. 이제는 수영복 대신 가벼운 바람막이를 걸치고, 모래 위를 천천히 거니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여름 내내 인파에 가려 보이지 않던 바다 본연의 푸른 색감이 드러나고, 파도 소.. 2025. 10. 27.
청주 상당산성, 시간의 켜를 거닐다 : 옛 성곽에 아로새겨진 영혼의 자취 가을의 문턱에서, 제 발길은 청주 상당산성으로 향했습니다. 상당산성이 주는 감동은 또 다른 결로 제 마음속에 파고들었습니다. 이곳은 자연의 웅장함 속에서 인간의 의지가 빚어낸 견고함과 조화가 어우러진 공간이었습니다. 오랜 역사의 흔적이 켜켜이 쌓인 성벽을 마주하며, 저는 고요히 흐르는 시간 속에서 저 자신을 돌아보고 새로운 영감을 얻는 귀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시간의 벽을 넘어, 상당산성과의 조우 청주 시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상당산성은 도심의 소음과 분주함으로부터 잠시 벗어나기에 더없이 완벽한 장소였습니다. 성문 앞에서 올려다본 웅장한 성벽은 지난 수백 년의 세월을 묵묵히 견뎌온 고뇌와 영광의 서사를 담고 있는 듯했습니다. 이 성은 통일신라 시대에 처음 축조되어 조선 시대에 이르러.. 2025. 10. 22.
새벽 비속 오색에서 대청올라 백담까지 설렘은 짙은 어두움에서어둠이 세상의 모든 윤곽을 삼켜버린 2025년 10월 15일 새벽 세 시, 저는 설악산 오색약수터 입구에 섰습니다. 작년 칠순기념산행으로 두 번 올랐던 산인데도 자연이 주는 숭고함 앞에서는 언제나 소년처럼 설레고, 때로는 미지의 두려움에 잠시 숙연해지곤 합니다. 이날의 설렘은 짙은 어둠만큼이나 깊었습니다. 희미한 헤드랜턴 불빛에 의지해야만 겨우 한 발자국을 내디딜 수 있는 칠흑 같은 밤, 하늘에서는 미세한 부슬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빗줄기가 아니었습니다. 존재의 미미함을 깨닫게 하는 서늘한 침묵이자, 동시에 산이 제게 건네는 묵직한 환영의 인사이기도 했습니다. 오색에서 대청봉으로 향하는 오르막길은 익히 알던 것보다 훨씬 가파르고 길게 느껴졌습니다. 빗물에 젖어 미끄러.. 2025. 10.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