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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130

나란히 걷는 두 바다 : 협재와 금능 해변 -휘준- 협재해수욕장을 걷다 보면, 어느 순간 모래사장이 살짝 넓어지고 바닷물이 더 잔잔해진다. 그리고 사람들의 말소리도 조금은 줄어든다. 바로 그 지점이 금능해수욕장이다. 협재와 금능, 두 해수욕장은 실은 울타리 하나 없이 연결되어 있지만, 기분은 사뭇 다르다. 형제 같은 두 바다, 그중에서도 나는 금능에서 마음이 잔잔해진다. 어느 여름날, 협재해변에서 반나절쯤 시간을 보내고 난 뒤였다. 햇살이 조금 누그러지고, 파라솔 아래 책을 덮은 뒤 자리에서 일어나 해안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바닷물은 여전히 맑고, 모래는 발에 착 붙었다. 몇 걸음 옮기니 협재의 활기찬 분위기가 서서히 멀어졌고, 대신 더 조용하고 여유로운 공기가 몸을 감쌌다. 해변이 넓어지고, 파도 소리가 낮아진 곳. 그곳이 금능해수욕장이었다. 금능은 .. 2025. 8. 3.
윤여선의 土曜斷想 : 외톨이 내 누님 [토요 단상(土曜斷想)] (2025.08.02)========={제 195회}========.1986년, 김포공항에서 큰 폭발물 테러 사건이 일어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 테러 사건은 당시 열릴 '아시안 게임'을 방해하기 위해, 북한이 아랍 테러조직을 사주해 저지른 것이었지요. 그 당시 김포공항에서 근무 중이었는데, 폭발 지점이 입국 검사장 입구라서 만일 근무 중이었다면 자칫 큰 피해를 입었을지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다행히 오전 근무일이라서 일찍 퇴근했기 때문에 오후에 일어난 그 사고 현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이지요..집에서 긴급 뉴스로 나오는 속보를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전화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렸습니다. 대전의 누님이 걸어온 전화였지요. 전화를 받자 대뜸 아무 일 없느냐고 연거푸 묻는 것이었.. 2025. 8. 2.
백록담 보름 만에 다시 가보다 -휘준- 저는 지금 바닷가에 살고 있습니다. 경제활동을 아니 하니 제주도에 있어도 달라질 게 없어섭니다.문만 열면 바다가 보이는 집은 비싸고, 한 3분쯤 걸으면 바다가 확 펼쳐지는 방을 하나 싸게 구했죠. 제주살이 2개월 차 중 1개월이 지나고 있습니다만 4~6개월도 있을 만합니다. 어젠 백록담 날씨예보에 미혹되어 7월 14일에 다녀온 곳을 다시 갔습니다. 사진 찍으러. 글은 어느 정도 쓰게 됐으니 사진작가 되는 게 꿈인데... 쉽잖군요. 나이 칠순을 넘기니 여기저기 행사도 많고, 그때마다 찍사가 필요하다며 찾아주어서 쓸모 있는 사람이 된 기분입니다. 백록담도 저를 쓸모 있는 친구로 보는지, 열 번은 오른 듯합니다. 록담 친구는 어느 쪽에서 오르나 한번 보고 가려면 10시간은 걸어야 합니다. 옛날 바람산악회 땐 .. 2025. 8. 1.
협재해수욕장에서 잠시, 여름을 벗다 -휘준- 제주의 해변은 어쩐지 풍경만으로도 속을 비워주는 힘이 있다. 그중에서도 협재해수욕장은 첫눈에, 아니 첫 바람에 반하게 되는 곳이다. 나는 그 반함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는 부류다. 협재는 계절마다 찾아도 늘 새로운 얼굴을 하고 있다. 그러니 ‘이번이 마지막’이라 말한 적도, 그렇게 믿은 적도 없다. 마치 제주라는 섬이, 나를 기어이 협재까지 이끌고 와서는 다시 한번 마음을 풀어놓는 식이다. 도착한 건 오전 10시 무렵. 햇살은 뜨거웠지만 모래는 아직도 아침의 서늘함을 품고 있었다. 주차장은 이미 반쯤 찼고, 사람들은 파라솔을 들고 바닷가로 향하는 중이었다. 차문을 닫고 한 걸음 바닷가로 옮겼을 뿐인데, 숨이 탁 트였다. 바람은 짠내보다 맑았고, 바다는 에메랄드빛이었다. 그림엽서보다 더 완벽한 풍경이 실제로.. 2025. 7. 31.
한림 오일장 옆, 로컬 커피방의 반전 매력 -휘준- 한림에 간다는 말은 대개 협재나 금능을 향한다는 말이다.바다가 예쁘고, 빵집이 줄을 세우고, 수국이나 동백이 철마다 주인공이 되는 동네.그러나 내가 향한 곳은 조금 달랐다.관광객보다 트럭이 많은, 건어물 냄새와 싱싱한 생선 비린내가 뒤섞인 한림 오일장 한복판.그곳엔 누가 봐도 "커피랑은 안 어울리는" 풍경이 펼쳐져 있다. 그렇다. 제주 한림의 진짜 얼굴은 국밥이 생각나는 오일장이다.사람 사는 냄새, 어르신들의 큰 목소리, 싸고 신선한 먹거리,그리고 그 시장 끝자락, 채소 좌판 옆에 있는 ‘온 동네 커피방’.간판은 작고, 입구는 시장 천막에 절반쯤 가려 있다.밖에서 보면, 차라리 ‘떡볶이 가게’ 같다고 해야 맞다.하지만 이곳은, 내게 여름마다 돌아오는 ‘비밀 아지트’다.커피방이 아니라 커피집, 문을 열고 .. 2025. 7. 30.
숲에서 나에게 보내는 짧은 편지 -휘준- 안녕, 오랜만이야.정말로 오랜만이지.이렇게 천천히 걷는 건 몇 달 만인지,이렇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시간은 몇 년 만인지숲 속을 걷다 멈춰 선 이 자리에서나는 너에게 처음으로, 아주 조용히 말을 건다.사실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었지만나는 너를 보지 않았다.매일 거울 앞에서 얼굴은 들여다보았지만네 마음속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물어보지 않았다.피곤하지는 않은지, 어디가 아픈 건 아닌지,요즘 어떤 꿈을 꾸고 있는지.그런데 오늘 이 숲길에서나는 문득 너의 숨소리를 들었다.아주 작은 들숨과 날숨,바람결에 따라 흔들리는 풀잎처럼살아 있다는 너의 증거가,이 조용한 나무 사이에서 선명하게 느껴졌다.숲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그 침묵이 너를 꺼내주었다.소란한 도시의 소음 속에 가려졌던너의 작은 목소리를내가 처음으로.. 2025. 7.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