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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13

인연 -피천득- 因 緣 -피천득-지난 사월 춘천에 가려고 하다가 못 가고 말았다. 나는 성심여자 대학에 가보고 싶었다. 그 학교에 어느 가을 학기, 매주 한 번씩 출강한 일이 있다. 힘든 출강을 한 학기 하게 된 것은, 주수녀님과 김수녀님이 내 집에 오신 것에 대한 예의도 있었지만 나에게는 사연이 있었다.수십 년 전 내가 열일곱 되던 봄, 나는 처음 동경(東京)에 간 일이 있다. 어떤 분의 소개로 사회 교육가 미우라(三浦) 선생 댁에 유숙을 하게 되었다. 시바꾸 시로가네(芝區白金)에 있는 그 집에는 주인 내외와 어린 딸 세 식구가 살고 있었다. 하녀도 서생도 없었다. 눈이 예쁘고 웃는 얼굴을 가진 아사코(朝子)는 처음부터 나를 오빠같이 따랐다. 아침에 낳았다고 아사코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하였다. 그 집 뜰에는 큰 .. 2025. 3. 20.
가장 오래 기다린 찬스 -휘준- 가장 오래된 망설임내가 기다리는 찬스는 죽을 때까지 안 올지도 모른다.은행 신용카드와 내가 인연을 맺은 지가 벌써 45년쯤 된다.지금은 신용카드 없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예전엔 확실한 신분과 소득을 증명해야 신용카드를 사용할 수 있었다.그래서 80년대까지는 카드에 신분 과시 효과도 있었다고 기억된다.​신용카드와 따로 생각할 수 없는 현금지급기.출시 초년부터 사용했기 때문에 서툰 사람들 앞에서 익숙하게 사용해 왔으며,으쓱한 기분으로 그들에게 사용법을 가르쳐 주기도 했었다.그러나 그 현금지급기를 나는 아직도 믿지 못한다.​사람의 망설임은 짧게는 순간이고 길어야 며칠이면 끝난다.그러나 나는 30여 년간 망설임을 버리지 못한 게 하나 있다.그것은 현금지급기 앞에서 꺼낸 돈을 세어보는 일이다. 돈이 혹시 모자라면.. 2025. 3. 19.
변비를 못이기고 대학 병원 응급실로, 치료비 26만 원 -휘준- 벌써 작년 겨울 기억이 되었네요. 2024년 1월 27일 토요일 8시, 금정역에 나갔더니 네 사람이 모였습니다. 평택역까지 급행 전철로 약 40분 이동, 평택역에서 510번 버스 타고, 약 50분 이동하여 영인산 들머리에 도착했습니다. 영인산 자연휴양림 입구부터 아이젠을 차며, 화장실을 찾아보았으나 없었습니다.​​정상 쪽 공원에서 반가운 화장실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배변엔 실패. 영인산은 봉우리가 4~5개 있었는데 첫 봉우리(상투봉)에서 하산을 결심했습니다. 일행에겐 지름길로 뒤따르겠다고 하고서 다시 그 화장실에 들렀으나 실패, 등산할 마음이 싹 가시고 찜찜해서 미련 없이 하산 결정. 이제 집까지 가는 길이 걱정되었습니다. 택시 타면 집까지 80분, 교통비 약 10만 원. 대중교통은 집까지 약 3시간 걸.. 2025. 3. 18.
그믐달 -나도향- 나는 그믐날을 몹시 사랑한다. 그믐날은 요염하여 감히 손을 댈 수도 없고, 말을 붙일 수도 없이 깜찍하게 예쁜 계집 같은 달인 동시에 가슴이 저리고 쓰리도록 가련한 달이다. 서산 위에 잠깐 나타났다 숨어버리는 초승달은 세상을 후려 삼키려는 독부(毒婦)가 아니면 철모르는 처녀 같은 달이지마는, 그믐달은 세상의 갖은 풍상을 다 겪고, 나중에는 그 무슨 원한을 품고서 애처롭게 쓰러지는 원부(怨婦)와 같이 애절하고 애절한 맛이 있다. 보름의 둥근 달은 모든 영화와 끝없는 숭배를 받는 여왕(女王)과 같은 달이지마는, 그믐달은 애인을 잃고 쫓겨남을 당한 공주와 같은 달이다. 초승달이나 보름달은 보는 이가 많지마는, 그믐달은 보는 이가 적어 그만큼 외로운 달이다. 객창한등(客窓寒燈)에 정든 임 그리워 잠 못 들어 하.. 2025. 3. 16.
나는 허수아비 진짜 허수아비 -휘준- © mosayyebnezhad, 출처 Unsplash허수아비 /휘준 "오케바리?"전철에 막 오르려는데 누가 귀에다 소리를 버럭 질렀다. 깜짝 놀라 쳐다보니 문간에 선 한 청년이 핸드폰을 받고 있었고 내 귀가 그의 입을 스친 꼴이었다. 문이 닫히자 차내가 조용해지고 그의 목소리도 줄어들었다. 그는 제 친구와 약속 장소를 정하는 모양인데 '찾아올 수 있겠지?'라는 뜻으로 그 말을 외쳤던 것이다.​그놈의 "오케바리?"외모도 준수한 청년이 여자친구의 머리칼을 연신 쓰다듬으며 말끝마다 ‘오케바리?’를 연발했다. 주위의 눈총도 모르는 체 상스러운 말투로 전화에 열중하고 있는 젊은이 둘은 흔한 말대로 '한 쌍의 바퀴벌레' 같았다. 전철이 서고 문이 열리자 소음이 커지고 그의 목소리도 다시 커졌다. "XX놈아 앞대가리.. 2025. 3. 12.
구두 -계용묵- 구두 수선을 주었더니, 뒤축에다가 어지간히는 큰 징을 한 개씩 박아 놓았다. 보기가 흉해서 빼어 버리라고 하였더니, 그런 징이래야 한동안 신게 되구, 무엇이 어쩌구 하며 수다를 피는 소리가 듣기 싫어 그대로 신기는 신었으나, 점잖지 못하게 저벅저벅, 그 징이 땅바닥에 부딪치는 금속성 소리가 심히 귓맛에 역(逆)했다. 더욱이 시멘트 포도(鋪道)의 딴딴한 바닥에 부딪쳐 낼 때의 그 음향(音響)이란 정말 질색이었다. 또그닥 또그닥, 이건 흡사 사람은 아닌 말발굽 소리다.  어느 날 초으스름이었다. 좀 바쁜 일이 있어서 창경원(昌慶苑) 곁담을 끼고 걸어 내려오노라니까, 앞에서 걸어가던 이십 내외의 어떤 한 젊은 여자가 이 이상히 또그닥거리는 구두 소리에 안심이 되지 않는 모양으로, 슬쩍 고개를 돌려 또그닥 소리.. 2025. 3.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