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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11

오름, 나를 찾아 떠나는 고독한 여정 -휘주니- 제주의 오름. 한라산을 중심으로 마치 봉긋한 어머니의 젖가슴처럼 솟아오른 360여 개의 작은 산들. 저마다 독특한 모양새와 빛깔, 그리고 이름이 제주의 바람과 햇살 속에 어우러져 있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성산일출봉이나 용눈이오름 같은 유명한 오름의 정상에서 탁 트인 풍광을 감상하며 감탄사를 쏟아내지만, 내게 오름은 그저 풍경의 일부가 아니다. 때로는 친구처럼 다정하고, 때로는 현자처럼 침묵하며 나를 기다려주는 존재. 특히나 발길 닿기 힘든, 혹은 이름조차 생경한 덜 알려진 오름들은, 나를 찾아 떠나는 고독한 여정의 시작점이 되어주곤 한다. 북적이는 인파와 시끌벅적한 소음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그곳에서, 나는 홀로 서서 바람 소리에 귀 기울이고, 내면의 깊은 곳으로부터 울려 퍼지는 소리에 집중한다. 정상을 .. 2025. 8. 27.
검은 현무암 해변, 바다의 눈물과 약속 -휘주니- 제주는 내게 늘 위로와 안식을 주는 섬이다. 특히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곳은 바로 검은 현무암 해변들. 수억 년의 시간을 품고 파도와 부대끼며 빚어진 그 검은 돌들은, 제주의 거친 생명력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눈부신 백사장과는 또 다른, 묵직하면서도 경이로운 아름다움이랄까. 시린 겨울바람에도 흔들림 없이 바다를 지키고 선 그 풍경은, 마치 오랜 삶의 고뇌를 견뎌낸 노인의 얼굴처럼 깊고 고요하다. 하지만 그 고요함 속으로 너무 깊이 발을 들이밀다 보면, 이내 마주하게 되는 불편한 진실이 있다. 틈새마다 끼어 있는 플라스틱 조각들, 형형색색의 어망 부표,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온갖 쓰레기들. 마치 이 아름다운 해변이 흘리는 소리 없는 눈물처럼, 그 모든 것들이 제주의 바다가 감내하고 있는 고통을 증언하.. 2025. 8. 27.
폭포 앞에서 느낀 감회: 천지연의 유려한 속삭임 제주 천지연폭포. 수많은 발걸음이 향하는 그곳. 폭포라는 자연 현상이 으레 그렇듯 특별한 새로움이 있을까 하는 사뭇 시큰둥한 마음으로 향했던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허나, 그곳에서의 마주침은 저의 좁은 혜량을 부끄럽게 만들었으니, 그 경험을 두서없이 기록해볼까 합니다. 여정의 시작부터 평범치 않았습니다. 폭포의 입구에서부터 쏟아져 나오는 인파는 흡사 시대의 명절 같았습니다. 필경, 이 모두가 폭포의 장엄함을 만나기 위함이겠지요. 저 혼자만의 호젓한 사색을 기대했던 것이 어리석었나 싶어 헛웃음이 터져 나오더군요. 매표소에 다다르니, 그 풍경은 가히 진풍경이었습니다. 흡사 공연장 티켓팅을 방불케 하는 행렬에 잠시 아연실색했지요. 아니, 이토록 많은 이들이 하나의 폭포를 향해 운집하다니. 폭포를 보러 온 것.. 2025. 8. 26.
곶자왈 탐험기: 돌 틈에서 숨 쉬는 원시의 심장 -휘주니- 제주는 바다와 한라산의 섬이지만, 그 너머에 숨겨진 또 하나의 심장이 있다. 바로 '곶자왈'이다. 이름부터 낯설고 신비로운 이 숲은, 흔히 생각하는 그저 그런 푸른 숲과는 차원이 다르다. 발음하기도 어려운 '곶자왈'이라는 이름 속에는, 곶(숲)과 자왈(자갈이나 암석이 뒤섞인 곳)이 합쳐진, 그야말로 제주의 독특한 자연환경을 고스란히 품은 원시림의 정체성이 오롯이 담겨 있다. 곶자왈은 마치 살아있는 미스터리 박스와 같아서, 그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우리는 시간의 경계를 허물고 태초의 지구로 돌아가는 듯한 아득한 신비감에 휩싸이게 된다. 돌 틈에서 피어나는 생명의 신비: 제주의 허파이자 보물창고곶자왈은 일반적인 숲과는 형성 과정부터가 다르다. 빌레(넓은 바위지대) 위에 엉기성기 얽힌 용암 덩어리들이 숲을.. 2025. 8. 25.
숨비소리, 물질의 경계에서 피어난 비망록 -휘주니- 제주의 바다에 발을 담그면, 차가운 물살 속에서도 뜨거운 생명의 온기를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 온기 한가운데에는 언제나 해녀들의 숨비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온다. '숨비소리'는 단순히 잠수부가 물 위로 올라와 내쉬는 거친 숨이 아니다. 그것은 깊은 바다와 인간의 경계에서, 삶과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며 이어지는 제주 해녀들의 오랜 비망록이자, 그들이 바다에 새긴 존재의 각인(刻印)이다. 삶의 궤적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진 숨비소리, 그 속에는 바다만큼 깊은 지혜와 파도처럼 거친 삶의 서사가 오롯이 담겨 있다. 차가운 물살 속의 온기 어쩌면 우리는 해녀의 삶을 너무나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눈부신 햇살 아래 검은 잠수복을 입고 해산물을 채취하는 모습, 사진엽서 속 그림 같은 풍경만 보아왔을 것.. 2025. 8.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