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해변은 어쩐지 풍경만으로도 속을 비워주는 힘이 있다. 그중에서도 협재해수욕장은 첫눈에, 아니 첫 바람에 반하게 되는 곳이다. 나는 그 반함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는 부류다. 협재는 계절마다 찾아도 늘 새로운 얼굴을 하고 있다. 그러니 ‘이번이 마지막’이라 말한 적도, 그렇게 믿은 적도 없다. 마치 제주라는 섬이, 나를 기어이 협재까지 이끌고 와서는 다시 한 번 마음을 풀어놓는 식이다.
도착한 건 오전 10시 무렵. 햇살은 뜨거웠지만 모래는 아직도 아침의 서늘함을 품고 있었다. 주차장은 이미 반쯤 찼고, 사람들은 파라솔을 들고 바닷가로 향하는 중이었다. 차문을 닫고 한 걸음 바닷가로 옮겼을 뿐인데, 숨이 탁 트였다. 바람은 짠내보다 맑았고, 바다는 에메랄드빛이었다. 그림엽서보다 더 완벽한 풍경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놀랍다.
협재해변은 한눈에 보기에도 단정한 해변이다. 제주 특유의 검은 현무암은 해변 뒤편에 바스러진 듯 놓여 있고, 바다와 맞닿은 모래사장은 넓고도 부드럽다. 모래알은 유난히 고왔고, 발끝으로 느껴지는 감촉은 마치 밀가루 위를 걷는 듯했다. 자잘한 조개껍데기도 반짝이며 간혹 발등에 말을 걸었다.
해수욕장 한가운데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튜브를 타고 물장구를 치는 소리, 파도를 향해 돌진하는 소리, 어른들이 부르는 이름들. 협재의 여름은 늘 그런 식이다. 생기가 있고, 경쾌하고, 한 편의 소란스러운 동화처럼 이어진다. 그런데 그 소란이 전혀 거슬리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그 풍경에 조용히 녹아들고 싶었다.
나는 바다에 들어가기보다 걸으며 바다를 감상하는 쪽이다. 이른바 ‘관망형 해수욕’ 애호가다. 발목 정도만 물에 담그고 바다를 걷다 보면 어느새 마음속에 응어리졌던 것들이 스르르 풀려나간다. 협재의 물은 유난히 맑고 얕다. 멀리까지 걸어 나가도 허리께도 차지 않는다. 어린아이를 데려와도 안심하고 놀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족 여행객들에게 특히 인기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해변 왼쪽으로는 비양도가 떠 있다. 마치 바다 위에 둥둥 띄운 초록빛 섬처럼. 그 풍경은 사진으로 남겨두기 아까울 정도로 아름답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 비양도를 바라보았다. 바람은 비양도 쪽에서 불어오고 있었고, 내 마음은 그 바람을 타고 저 섬까지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언젠가 그 섬에도 들어가볼 날이 있으려나,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다.
해변 옆엔 작고 예쁜 카페들이 줄지어 있다. 해변 뷰를 품은 루프탑 카페, 나무 그늘 아래 놓인 테이블, 그리고 제주 특유의 감귤 아이스크림을 파는 작은 가판대. 나는 파도 소리를 가까이 들으며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들고 느긋하게 자리를 잡았다. 시간은 멈춘 듯 흘렀고, 나도 괜히 그 흐름을 따라 흘러가는 사람인 듯 느껴졌다.
협재해변의 또 하나의 매력은 해 질 무렵이다. 오후 6시를 넘기면 햇살이 길게 늘어지고, 모래사장에는 그림자가 쌓인다. 바다 색깔은 점점 짙은 파랑으로 물들고, 비양도 너머로 노을이 번진다. 나는 그 시간대의 협재를 가장 좋아한다. 사람들은 하나둘 짐을 싸고 자리를 뜨지만, 나는 그때부터가 진짜 협재라고 생각한다. 하루를 온전히 품은 바다가, 이제는 조용히 안식을 권하는 시간. 나는 그 품 안에서 조용히 하루를 정리했다.
협재를 떠나기 전, 해변 끝 쪽으로 걸어가봤다. 평소에는 잘 가지 않던 구석진 모퉁이, 그곳에선 아이들이 작은 게를 찾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모래를 뒤적이는 모습이 어쩐지 예전의 나를 보는 듯했다. 나도 어릴 적 그런 적 있었다. 바닷가에서 작은 생물을 찾아 땅을 파고, 해가 저물면 아쉬워하며 집으로 돌아갔던 여름날. 협재의 풍경은, 그 기억을 소환하기에 더없이 좋은 배경이 되어주었다.
돌아오는 길, 해변에서 조금 떨어진 협재마을 초입의 파란색 담벼락이 눈에 들어왔다. 어떤 문구가 손글씨로 적혀 있었다.
“바다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작아진다. 작아져서 가볍고 따뜻해진다.”
나는 그 글귀를 천천히 읽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협재는 내 마음을 작고 가볍게 만들어주는 곳이다. 여름의 무게까지도 잠시 잊게 해주는 그런 장소. 올해도 나는 협재를 찾았고, 마음 한켠에 또 한 겹의 여름을 덧입혔다. 그리고 다음 여름에도 아마 또다시 이곳을 찾겠지. 해마다 같은 해변이지만, 그해의 나와, 그해의 햇살, 그해의 바람은 언제나 다르니까. 협재는 그런 계절의 조각들을 모아 나에게 건네주는 고요한 친구 같다.
이번 여름, 잠시 협재에서 쉬었다. 이 계절은, 내 안에 오래 머물 것 같다.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림 오일장 옆, 로컬 커피방의 반전 매력 -휘준- (3) | 2025.07.30 |
---|---|
숲에서 나에게 보내는 짧은 편지 -휘준- (0) | 2025.07.29 |
바다가 안 보이는 바닷가 카페 : 한림 ‘카페 고마워요' -휘준- (6) | 2025.07.28 |
저지리 곶자왈 속 비밀 : '하루나무'라는 카페 -휘준- (2) | 2025.07.27 |
윤여선의 土曜斷想 : 구두닦이 (1) | 2025.07.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