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24 가시리 녹산로 & 따라비 오름, 억새의 파도와 가을의 전망대 제주 동쪽 남원과 표선을 잇는 가시리 녹산로는 가을이 되면 ‘억새의 왕국’으로 변신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 도로 양옆으로 억새가 하얀 파도를 이루며 흔들리고, 그 길 끝에는 소박하면서도 매혹적인 따라비 오름이 우뚝 서 있다. 누군가는 이 길을 ‘억새 고속도로’라 부르고, 또 다른 이는 ‘가을의 대형 카펫’이라 한다. 어떤 이름을 붙이든 상관없다. 그저 가을 바람에 스치는 억새의 물결을 따라가다 보면, 마음까지도 하얗게 씻기는 듯하다. 녹산로, 억새의 바다 위를 달리다 9월 말이 되면 가시리 녹산로는 차창을 열고 달리기만 해도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느껴진다. 길 양옆의 억새가 바람에 일제히 고개를 흔들면, 마치 ‘어서 와, 가을 여행자!’ 하고 환영 인사를 건네는 듯하다. 햇살에 비친 억새의 은빛은 고급.. 2025. 10. 31. 중문 색달해변, 파도와 사람 그리고 한 접시의 바다 계절 따라 달라지는 색달해변의 표정 제주 중문 색달해변은 계절마다 다른 표정을 보여주는 해변이다. 여름 성수기에는 해수욕을 즐기려는 여행객들로 북적이며, 아이들이 튜브를 끌고 파도에 몸을 맡긴다. 9월 초까지는 여전히 바다에 몸을 담글 수 있어, 물놀이를 즐기는 이들의 웃음소리가 해변을 가득 채운다. 뜨거운 햇볕에 모래사장은 금빛으로 반짝이고, 파도는 장난기 어린 아이처럼 가볍게 사람들을 밀어낸다. 해변 입구에는 차양막과 파라솔이 늘어서고, 여름의 열기는 그곳에서 절정을 이룬다. 하지만 9월 중순이 넘어가면 분위기는 사뭇 달라진다. 이제는 수영복 대신 가벼운 바람막이를 걸치고, 모래 위를 천천히 거니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여름 내내 인파에 가려 보이지 않던 바다 본연의 푸른 색감이 드러나고, 파도 소.. 2025. 10. 27. 버려지는 사람의 두 번째 삶 우리는 살아가면서 누군가에게 버려지는 순간을 맞이한다. 사회 속에서, 일터에서, 심지어 가족과의 관계 속에서도 느낄 수 있는 소외감과 공허함. 처음에는 그것이 삶의 끝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사람 역시 사물이나 시간처럼 두 번째 삶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그 삶은 스스로를 돌아보고, 새로운 역할을 찾으며, 누군가와의 관계 속에서 다시 피어날 때 시작된다. 사회 속에서 버려진 듯한 나 젊은 시절, 나는 일과 사람들 속에서 쉼 없이 달렸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역할에서 밀려나고,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처음에는 그 공백이 쓰라렸고, 하루하루가 허무하게 느껴졌다. 마치 시간과 사물처럼 나도 버려진 존재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오래된 사진첩을 꺼내 들었다.. 2025. 9. 3. 버려지는 시간의 두 번째 삶 우리는 하루를 살면서 많은 시간을 흘려보낸다.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보내기도 하고, 때로는 일에 치여 소중한 순간들을 놓치기도 한다.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흘러간 시간을 ‘낭비’라고 부른다. 그러나 나는 시간이 정말 버려지기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믿는다. 시간도 두 번째 삶을 얻을 수 있으며, 그것은 우리가 다시 돌아보고, 의미를 부여할 때 시작된다. 흘러간 시간은 단순히 지나간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다르게 바라볼 때 새로운 가치로 되살아난다. 느리게 흐르는 시간의 재발견 아침부터 바쁘게 시작된 하루, 나는 시계를 들여다보며 이미 흘러간 시간들을 세곤 한다. 지하철을 기다리는 10분, 신호를 기다리며 서 있는 3분, 커피를 준비하며 흘러간 5분, 사람들은 그냥 흘려보낸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2025. 9. 2. 버려지는 것들의 두 번째 삶 -휘주니- 우리는 살아가며 수없이 많은 것들을 버린다. 종이 한 장, 깨진 그릇, 낡은 옷, 더는 쓸모 없어진 물건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들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어떤 것은 새로운 모습으로 되살아나고, 어떤 것은 기억의 한 자락에 머물러 다시 빛난다. 나는 그것을 ‘두 번째 삶’이라 부르고 싶다. 오늘은 내가 걸어오며, 살아오며 마주친 버려진 것들의 두 번째 이야기를 기록해 본다. 종이와 책이 남기는 흔적 아침에 우편함을 열면, 전단지와 광고지가 쏟아져 나온다. 대부분은 곧장 휴지통으로 향한다. 그러나 그 종이들이 모두 무가치한 것은 아니다. 한때는 나무였고, 햇빛을 머금고 자라던 생명이었다. 그것이 잘려 나와 종이가 되었고, 다시 인쇄되어 세상에 뿌려졌다. 사람들은 그것을 스쳐 지나가며 버리지만.. 2025. 8. 30. 세대별 언어 사전 만들기 언어는 시대의 거울이다. 같은 단어라도 어느 세대가 쓰느냐에 따라 뜻이 달라지고, 그 뉘앙스도 바뀐다. 마치 하나의 단어가 시간 여행을 하듯, 세대를 넘나들며 새 옷을 입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요즘 ‘세대별 언어 사전’을 만들어 보고 싶어졌다. 10대, 20대, 그리고 50대 이상이 똑같은 단어를 어떻게 다르게 쓰는지를 살펴보는 일. 이 사전은 국립국어원의 공식 자료가 되진 못하겠지만, 적어도 세대 간의 오해를 줄이는 다리 정도는 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단어, 다른 세상 먼저 예를 들어보자. “엄청나다”라는 단어. 50대 이상에게 엄청나다는 말은 주로 놀라운 사건, 혹은 심각한 사태에 쓰였다. “요즘 물가가 엄청나게 올랐어.” 여기서 엄청나다는 곧 걱정이나 부담의 색채를 띤다. 반면 20대에게 엄청.. 2025. 8. 29. 이전 1 2 3 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