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림에 간다는 말은 대개 협재나 금능을 향한다는 말이다.
바다가 예쁘고, 빵집이 줄을 세우고, 수국이나 동백이 철마다 주인공이 되는 동네.
그러나 내가 향한 곳은 조금 달랐다.
관광객보다 트럭이 많은, 건어물 냄새와 싱싱한 생선 비린내가 뒤섞인 한림 오일장 한복판.
그곳엔 누가 봐도 "커피랑은 안 어울리는" 풍경이 펼쳐져 있다.
그렇다. 제주 한림의 진짜 얼굴은 국밥이 생각나는 오일장이다.
사람 사는 냄새, 어르신들의 큰 목소리, 싸고 신선한 먹거리,
그리고 그 시장 끝자락, 채소 좌판 옆에 있는 ‘온 동네 커피방’.
간판은 작고, 입구는 시장 천막에 절반쯤 가려 있다.
밖에서 보면, 차라리 ‘떡볶이 가게’ 같다고 해야 맞다.
하지만 이곳은, 내게 여름마다 돌아오는 ‘비밀 아지트’다.
커피방이 아니라 커피집, 문을 열고 들어가면 먼저 반기는 건
누군가 오래 앉아 있던 듯한 나무 의자들이다.
시장에서 일하다가 잠시 쉬러 들어온 듯한 동네 할머니,
방학을 맞은 중학생 둘, 그리고 종이컵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든 젊은 부부가
묘하게 잘 어울리는 풍경을 만든다.
‘온동네 커피방’은 바닐라라테 대신 믹스커피도 판다.
아이스커피 1,500원. 심지어 종이컵에 테이크아웃 가능.
하지만 나는 항상 안에 앉아 마신다.
왜냐하면 이곳의 정서는
에어컨 바람보다 따뜻하고, 비싼 원두보다 구수하기 때문이다.
주문을 마치면 사장님은 꼭 한마디를 덧붙이신다.
“시장 구경 좀 하시다 오셨어요?”
그 질문이 마치 "오늘 당신 괜찮으셨어요?"처럼 들린다.
말 한마디가 참 정겹다. 그래서 나는 이곳을 ‘커피방’이라 부르고 싶어진다.
카페보다는 훨씬 사람이 묻어나는 공간이니까.
여기는 평상이 소파다. 커피방 옆에는 좁은 뒷마당이 있다.
작은 평상 하나, 파라솔, 그리고 다육이 몇 개.
그늘 속에 자리를 잡고 앉으면, 시장 소음도 음악처럼 들린다.
누군가 깎는 수박 소리, 어묵 튀기는 기름 소리,
그리고 가끔 들리는 시장 상인들의 재치 있는 외침.
거기 앉아 아이스커피를 마시며 책을 펼치거나 그냥 하늘을 본다.
마당 저쪽에 매달린 빨랫줄에는 사장님의 앞치마가 마르고 있다.
아, 이곳은 꾸며진 곳이 아니다. 그래서 더 진짜다.
사진 찍기 좋게 ‘감성 필터’를 얹은 공간이 아니라
그대로의 제주의 생활이 녹아 있는 한 조각의 일상.
무심한 듯 다정한 손길로 내 커피를 내려준 사장님은
오전엔 시장에서 장을 보고, 오후엔 커피를 내리며,
저녁엔 고양이 밥을 챙긴다고 했다.
어쩌면 이 커피방도, 하루의 리듬 속에서 우연히 생긴 쉼표 같았다.
반전은 ‘편안함’이다. 사실 이곳의 커피는 특별하지 않다.
스페셜티 원두도 아니고, 핸드드립도 아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곳에서 마신 커피는 늘 마음을 편하게 만든다.
그건 아마도, 공간이 주는 에너지 때문일 것이다.
누구도 허세부리지 않고, 누구도 뽐내지 않으며, 각자의 속도로 머물다 가는 곳.
여기엔 노트북을 펴고 있는 사람도, 사진을 찍는 사람도 드물다.
다들 잠깐의 짬을 내어 숨을 고르러 온 사람들이다.
그래서일까, 이 커피방은 오히려
‘로컬스러움’이란 단어를 제대로 설명해 주는 느낌이다.
나는 이곳에서 마음을 낮춘다.
작은 컵 하나에, 시장 사람들의 하루가 담겨 있다.
그 삶의 진동이, 나의 하루에 잔잔히 스며든다.
그 반전의 맛은, 결국 커피가 아니라
‘어디에 앉아 마시는가’에서 오는 것 아닐까.
다음에도, 또 올 겁니다
한림 오일장은 매월 3일과 8일에 선다.
그날에 맞춰 오일장 구경도 하고, 시장 김밥도 사고,
그리고 마지막엔 늘 ‘온동네 커피방’에 들른다.
마당 평상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나는 한참을 앉아 있다가 조용히 일어난다.
사장님은 꼭 이렇게 인사하신다.
“다음에 또 오세요. 그날도 시원한 거 드릴게요.”
그 말에 나는 마음이 덥혀진다.
이 커피방은 그렇게 내 여름날의 바람 같은 존재다.
세차게 불지 않지만, 내 안에 시원한 여운을 남기는 그런 바람.
📍온동네 커피방 가는 길
한림오일장 동문시장 입구 왼쪽 골목 안쪽, 구 한림시장 상가 뒤편 작은 건물.
간판이 작아 보이지 않으니, 시장 김밥집 옆 ‘구옥 느낌’ 나는 입구를 주의 깊게 찾아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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