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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윤여선의 土曜斷想 : 외톨이 내 누님

by 휘준쭌 2025. 8. 2.

[토요 단상(土曜斷想)] (2025.08.02)
========={제 19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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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김포공항에서 큰 폭발물 테러 사건이 일어난 적이 있었습니다.

외톨이 내 누님
외톨이 내 누님

 

그 테러 사건은 당시 열릴 '아시안 게임'을 방해하기 위해, 북한이 아랍 테러조직을 사주해 저지른 것이었지요. 그 당시 김포공항에서 근무 중이었는데, 폭발 지점이 입국 검사장 입구라서 만일 근무 중이었다면 자칫 큰 피해를 입었을지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다행히 오전 근무일이라서 일찍 퇴근했기 때문에 오후에 일어난 그 사고 현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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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긴급 뉴스로 나오는 속보를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전화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렸습니다. 대전의 누님이 걸어온 전화였지요. 전화를 받자 대뜸 아무 일 없느냐고 연거푸 묻는 것이었습니다.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지요. 아무런 일 없이 괜찮다고 대답하자, 천만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는 것이었지요. 무척 많이 놀란 것 같았습니다.

 

누님과 통화를 마친 후, 육친의 정이란 것에 대한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어렸을 적 같이 살아온 때를 제외하고, 자라고 나서 각자 다른 길을 걸어오는 동안 서로 소식을 나누는 일도 드물었는데, 누님은 그동안에도 나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근무지인 김포공항의 대형 테러 폭발사건 소식을 들었을 때, 거기서 근무하는 동생의 안위가 걱정되어 전화로 급히 확인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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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살 위인 누님을 생각할 때마다, 지금도 마음 한 구석에 아릿한 아픔 같은 것을 느끼곤 합니다. 어려웠던 시절,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자신의 길에 혼선을 느끼며 고달프게 살아온 당시 젊은 여성들의 전형적인 삶을 살았던 누님이지요. 물론, 여유로운 삶을 살고 공부를 많이 했더라면 겪지 않았을지도 모를 어려움들이지만, 주위의 도움 없이 자신의 인생길을 홀로 개척해 나아가야만 했던 누님의 삶의 고단함을 지금도 문득문득 아픔으로 느끼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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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인지는 몰라도, 며칠 전에 그러한 누님의 삶을 연상시켜 주는 책을 하나 읽었습니다. 누군가가 단톡방에 올려서 한 번 읽어보라고 소개해준 책이었지요. 성격이 괴팍해서 그런지, 여성 작가가 쓴 소설은 잘 읽지 않는 편인데, 평소 신뢰가 가는 사람이 추천한 책이었기 때문에 한 번 읽어보기로 했던 것입니다.

 

그 책은, 한 소녀의 성장 과정과 성인이 된 후의 삶의 모습을 그린 책이었지요. 달동네에서 태어나 사격 특기의 장학생으로서, 그리고 대학 연구실의 급사로 아르바이트하며 야간 상업학교를 어렵게 마친 후, 여러 직업을 거치며 살아가는 한 여인의 삶의 이야기입니다. 

 

성격이 양순해서 남과 다투지도 못하고, 그저 마음속으로만 삭이면서 살아가는 주인공의 모습이 독자로 하여금 어떤 형태로든 도움을 주고 싶어 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킵니다. 단위농협의 임시 계약직으로 성실히 근무해도 정식 발령을 받지 못하고, 민원인의 횡포에 오히려 시말서를 내고, 결국 직장을 떠나야 하는 한 여인의 모습은 잊고 있었던 내 누님의 또 다른 모습을 떠올려 주었습니다.

 

어찌 보면 극적인 요소가 없는 밋밋한 이야기의 전개이고, 시말(始末)이지만, 그래도 그 안에서 재미를 느끼는 것은 이제까지 상상 속에서만 추측해 왔던 일반적인 여인의 삶을 단편적으로나마 엿볼 수 있는 재미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소설을 덮고 있는 전체적인 문장이 어렵지 않고, 때로는 상식을 뛰어넘는 참신한 표현이 놀라움을 주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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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의 먼지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좁은 방안을 부유하며 긴 하루를 연장했다."
"시간은 빛처럼 달아났다."
"삶은 잘 닦인 신작로, 때론 미로"
"분홍과 검정이 가로로 그어진 질 낮은 면 티셔츠를 입고 있어서인지 잔뜩 부푼 밀가루 반죽처럼 통통한 여자 아이가 웃고 있었다."
"서쪽 유리창에 부딪혀 노랗게 부서지는 귤빛 가을 햇살이 눈에 들어왔다."
"허공에 머물러 있던 찬 공기가 마스크처럼 얼굴을 덮었다."
"시간은 빠르게 기화되었다."
"무심코 트로트 멜로디를 흥얼거리는 어머니를 보았을 때의 평화로운 시간은 리듬을 타며 부드럽게 흘러갔다."

소설 속의 튀는 문장들 모음입니다 만, 이토록 신선한 문장들은 다른 작품 속에서는 찾기 어려운 것들이지요.


'양선미' 작가의 장편소설 <영이의 고독>은 얼핏 성인들이 읽는 동화처럼, 읽기 쉽고 편한 소설입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자라나고, 공부하지만, 스스로 불행하다거나, 무언가 부족함을 느껴 세상을 향해 분노하거나 , 이로부터 도피하려 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묵묵히 헤쳐나가는 한 여인의 이야기이지요.

 

주인공 '영이'는 남을 미워하지도, 다투지도 않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여건과 운명 속에서 더 나빠지지 않도록 말없이 노력하고, 스스로와 싸워나갈 뿐이지요. 그래서 그녀는 작가가 붙인 제목처럼 언제나 고독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외톨이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이 소설을 읽는 동안, 홀몸으로 세상의 모든 한파와 싸우다 결국 병마에 무너져버린 내 누님의 고독한 삶의 모습을 떠올려 주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윤여선/관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