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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윤여선의 土曜斷想 : 잊혀지지 않는 그 사람

by 휘준쭌 2025. 8. 16.

토요 단상(土曜斷想)] (2025.08.16)
========={제 197회}=======

잊혀지지 않는 사람
잊혀지지 않는 사람

 

이따금 잊을만하면 기억 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고향 사람도 아니고, 학창 시절 절친하게 우정을 나눴던 친구도 아니지요. 의외이겠지만, 그는 사무소를 연지 얼마 안 됐을 무렵, 한동안 거래를 했던 물류회사의 대표였습니다. 흔한 말로 '갑'의 존재였던 사람이지요. 요즘도 그의 모습을 떠올릴 때가 있는 데, 그럴 때면 고향에서 함께 자랐던 어린 시절의 친구를 떠올리는 듯한 그리운 감정을 느끼곤 합니다.


사회적인 계약 관계 속에는 '갑(甲)'과 '을(乙)'이 존재합니다. '갑'이 주도적인 권한을 행사하는 반면, '을'은 종속적인 위치에 놓이는 것이 사회적인 통례이지요. 서비스업을 영위하는 입장에서는 업무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서도 '갑'에게 우위적인 위치를 내어 줄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통념이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 갑과 을의 관계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한 거래처 대표와 나누었던 '우정'을 통해 체험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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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견 물류회사 대표였던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사무소를 운영한지 얼마 안 된 때였습니다. 사업이랄 것도 없지만, 그래도 오랜 공직생활을 접고 첫 발을 내딛은 분야에서 안정적으로 자리잡기 위해 필요한 것은 거래처를 많이 확보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엔가, 거래처 중 하나였던 화공약품을 수입하는 다국적 무역업체의 여직원과 대화 중, 자기 회사와 거래하는 물류회사가 하나 있는데, 사장이 괜찮은 사람이니 한 번 찾아가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여직원의 말에 따라 큰 기대하지 않고, 아무런 약속도 없이 그 회사를 찾아갔지요.

 

직원의 안내로 대표를 만났는데, 왠일인지 처음 만난 그가 마치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사람처럼 빙글빙글 웃으며 자리를 권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상한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에게 회사 소개와 업무 협력 방안을 얘기한 후, 업무 의뢰를 요청했더니 선선히 담당 부장을 불러 거래처 중 몇 개 업체를 선정해 통관업무를 맡기도록 지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그 회사와의 거래는 그 규모가 점차 커져 우리 사무소의 가장 큰 수입원이 되었지요. 업무량이 늘어남에 따라 그와의 만남도 빈번해져 점차 친구와 같은 관계로 발전했습니다. 나이도 1년 차이 밖에 나지 않아, 격식 없이 반말로 대화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갑과 을의 관계를 허물어버린 그의 포용력에서 기인한 것이었지요. 나중에 그 회사 직원을 통해 안 사실이지만, 그는 내가 현직에 있을 때 자주 방문했고, 업무에 대해 몇 번인가 나의 안내를 받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나는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언젠가는 술에 너무 취하고, 기분도 좋아 그의 직원들 앞에서 그에게 심한 농담을 해 그 쪽 직원이 크게 화를 냈지만, 그는 오히려 웃으면서 그 직원을 달랜 적도 있습니다. 그 물류회사는 주로 다국적(多國的) 업체의 수입물품에 대한 일괄 운송을 대행해 주고 있었는데, 업무 자체에 큰 어려움이나 문제는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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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할지, 그 회사의 업무량이 많이 늘어나고, 규모가 커짐에 따라 그의 욕심도 커져, 나중에는 중국 진출의 야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단순한 운송이 아니라 '복합운송주선'업에 진출한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큰 실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복합운송주선업이 그렇듯, 자금의 회수가 제대로 되지 않고, 투자만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던 것입니다. 게다가 중국의 파트너가 건전한 회사가 아니었던 것이지요. 늘어나는 빚 속에 그 회사는 서서히 무너져 갔고, 결국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그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것은, 여기저기 사채를 끌어다 쓸 정도의 금전적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의 지불금은 제대로 맞추어 주려 애썼다는 점이지요. 비록 얼마간의 미수금은 해결 못한 채 그가 어느날 갑자기 잠적해 버리고 말았지만, 지금도 그에 대해 추호의 섭섭함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그의 사정을 생각지 않고 독촉을 했던 데 대한 미안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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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잠적하고, 회사가 문을 닫은 날, 소식을 듣고 그 회사로 달려 갔을 때에는 넓은 사무실이 텅 빈 채, 여직원 3명과 남직원 1명이 망연히 허공을 바라보며 앉아 있을 뿐이었습니다. 여기저기 서류들이 흩어져 있고, 사채업자인 듯한 사람들 몇이 험상궂은 얼굴로 드나들 뿐, 한 때 활기를 띠었던 사무실 분위기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남의 회사 일이지만, 황당한 모습을 대한 순간 울컥 가슴에서 치밀어 오르는 무언가를 억누를 수 없었지요. 어릴 적 부터 함께 자란 친구가 당한 불행을 보는 듯한 슬픔으로 눈물이 나올 것 같았습니다. 결국 사무실을 나오면서 울분을 토하 듯, 앉아 있는 직원들을 향해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힘 내세요! 사장님이 반드시 회사를 다시 일으키실 겁니다!"

 

그리고 밖에 나와서 건물 계단 구석에 쭈그려 앉아 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예상대로 응답이 없었습니다. 응답이 있었다면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었겠지요. 계속 전화를 안 받는 그에게 대신 문자를 보냈습니다.

"사장님, 힘 내세요. 무엇보다 건강하시구요. 그리고 아무때든 연락 꼭 주시기 바랍니다."

이상이 그와의 만남과 헤어짐의 전말(顚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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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 그에게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고, 여러 방면으로 수소문해 보았지만 소식을 알 수 없었습니다. 풍문으로 그가 중국에 있다느니, 누군가가 한 번 본 적이 있다느니 하는 뜬 소문만 들려 올 뿐, 구체적인 내용은 없었습니다. 만일 그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식사를 함께 하면서 그 당시에 못다했던 이야기들을 허심탄회하게 나누고 싶습니다. 예전의 갑과 을의 관계가 아니라, 얼마 남지 않은 세월을 함께 지낼 수 있는 진정한 친구로서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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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윤여선(다니엘)/관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