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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현무암 해변, 바다의 눈물과 약속 -휘주니- 제주는 내게 늘 위로와 안식을 주는 섬이다. 특히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곳은 바로 검은 현무암 해변들. 수억 년의 시간을 품고 파도와 부대끼며 빚어진 그 검은 돌들은, 제주의 거친 생명력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눈부신 백사장과는 또 다른, 묵직하면서도 경이로운 아름다움이랄까. 시린 겨울바람에도 흔들림 없이 바다를 지키고 선 그 풍경은, 마치 오랜 삶의 고뇌를 견뎌낸 노인의 얼굴처럼 깊고 고요하다. 하지만 그 고요함 속으로 너무 깊이 발을 들이밀다 보면, 이내 마주하게 되는 불편한 진실이 있다. 틈새마다 끼어 있는 플라스틱 조각들, 형형색색의 어망 부표,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온갖 쓰레기들. 마치 이 아름다운 해변이 흘리는 소리 없는 눈물처럼, 그 모든 것들이 제주의 바다가 감내하고 있는 고통을 증언하.. 2025. 8. 27.
바람과 돌담이 속삭이는 제주의 옛 이야기 -휘주니- 제주가 품은 이야기 제주는 말이지, 돌하르방의 인자한 미소만으로 설명하기엔 너무 깊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섬이여. 그 숱한 이야기가 어디에 깃들어 있나 보면, 난 기어이 이 제주 땅의 꼬불꼬불한 돌담길에 닿더라마. 육지 사람들은 그저 '돌덩이'라 할지 모르지만, 이 섬에서 나고 자란 이들에겐 이 돌담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역사고, 피와 땀이 서린 삶의 증거인 게지. 70 평생 제주 바람을 벗 삼아 살아온 나에게 돌담은 단순한 경계가 아니여. 속삭이는 바람 소리에 귀 기울이면, 마치 나지막한 목소리로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늙은 할망 같달까. 어르신들은 이 돌담을 두고 '밭담'이라 불렀어. 밭의 경계를 나누고, 드센 제주 바람을 막아주고, 오가는 가축들까지 품어주던 살림의 터전이었지. 제주의 땅은 척박했어. 화.. 2025. 8. 26.
기억의 서랍을 여는 사람 우리 삶의 거대한 기억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사진첩을 넘기다 보면, 이 작은 기계가 단순한 통신 도구를 넘어 우리 삶의 거대한 기억의 서랍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안에는 첫 번째 여름휴가에서 아이가 지었던 천진난만한 웃음이 있고, 이별 후 말없이 지나간 쓸쓸한 계절의 풍경이 있으며, 잊고 지냈던 친구들과의 어느 밤의 수다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앨범 속 사진 한 장 한 장을 만질 때마다 과거의 공기가 손끝에서 다시 살아나는 듯하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불안을 느낀다. 수십만 장의 사진들이 과연 안전할까? 언젠가 이 데이터가 사라져 버리진 않을까? 하드 드라이브가 고장 나고, 클라우드 서비스가 종료되고, 파일 형식이 시대에 뒤처져 더 이상 열어볼 수 없는 순간이 온다면, 이 모든 기억들은 어떻게 .. 2025. 8. 26.
폭포 앞에서 느낀 감회: 천지연의 유려한 속삭임 제주 천지연폭포. 수많은 발걸음이 향하는 그곳. 폭포라는 자연 현상이 으레 그렇듯 특별한 새로움이 있을까 하는 사뭇 시큰둥한 마음으로 향했던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허나, 그곳에서의 마주침은 저의 좁은 혜량을 부끄럽게 만들었으니, 그 경험을 두서없이 기록해볼까 합니다. 여정의 시작부터 평범치 않았습니다. 폭포의 입구에서부터 쏟아져 나오는 인파는 흡사 시대의 명절 같았습니다. 필경, 이 모두가 폭포의 장엄함을 만나기 위함이겠지요. 저 혼자만의 호젓한 사색을 기대했던 것이 어리석었나 싶어 헛웃음이 터져 나오더군요. 매표소에 다다르니, 그 풍경은 가히 진풍경이었습니다. 흡사 공연장 티켓팅을 방불케 하는 행렬에 잠시 아연실색했지요. 아니, 이토록 많은 이들이 하나의 폭포를 향해 운집하다니. 폭포를 보러 온 것.. 2025. 8. 26.
곶자왈 탐험기: 돌 틈에서 숨 쉬는 원시의 심장 -휘주니- 제주는 바다와 한라산의 섬이지만, 그 너머에 숨겨진 또 하나의 심장이 있다. 바로 '곶자왈'이다. 이름부터 낯설고 신비로운 이 숲은, 흔히 생각하는 그저 그런 푸른 숲과는 차원이 다르다. 발음하기도 어려운 '곶자왈'이라는 이름 속에는, 곶(숲)과 자왈(자갈이나 암석이 뒤섞인 곳)이 합쳐진, 그야말로 제주의 독특한 자연환경을 고스란히 품은 원시림의 정체성이 오롯이 담겨 있다. 곶자왈은 마치 살아있는 미스터리 박스와 같아서, 그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우리는 시간의 경계를 허물고 태초의 지구로 돌아가는 듯한 아득한 신비감에 휩싸이게 된다. 돌 틈에서 피어나는 생명의 신비: 제주의 허파이자 보물창고곶자왈은 일반적인 숲과는 형성 과정부터가 다르다. 빌레(넓은 바위지대) 위에 엉기성기 얽힌 용암 덩어리들이 숲을.. 2025. 8. 25.
숨비소리, 물질의 경계에서 피어난 비망록 -휘주니- 제주의 바다에 발을 담그면, 차가운 물살 속에서도 뜨거운 생명의 온기를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 온기 한가운데에는 언제나 해녀들의 숨비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온다. '숨비소리'는 단순히 잠수부가 물 위로 올라와 내쉬는 거친 숨이 아니다. 그것은 깊은 바다와 인간의 경계에서, 삶과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며 이어지는 제주 해녀들의 오랜 비망록이자, 그들이 바다에 새긴 존재의 각인(刻印)이다. 삶의 궤적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진 숨비소리, 그 속에는 바다만큼 깊은 지혜와 파도처럼 거친 삶의 서사가 오롯이 담겨 있다. 차가운 물살 속의 온기 어쩌면 우리는 해녀의 삶을 너무나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눈부신 햇살 아래 검은 잠수복을 입고 해산물을 채취하는 모습, 사진엽서 속 그림 같은 풍경만 보아왔을 것.. 2025. 8.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