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시절, 싸움꾼이 아닌 내가 주먹패들에게 기죽지 않고 학교에 다닌 것은 불량한 복장 덕분도 있었다. 교복 바지 대신 건빵 주머니가 달린 미군 전투복을 염색해서 입고 중고품 워커를 끌고 다녔는데 선생님께 몇 차례 걸려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엄마한테 워커도 괜찮다고 속이고 산 것이니 구두나 교복 바지 살 돈을 또 타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생활지도 선생님에게서 최후통첩이 왔다. ‘부모님을 모셔 올 것’
하루를 사흘처럼 고민하고 고민하다가 학교 앞 탁구장 주인을 아버지로 꾀는 데 성공했다. 탁구장 주인 가짜 아버지가 교무실에서 어떻게 시간을 때우고 나왔는지는 기억나질 않는다. 단지 교무실에서 나온 그는 다시는 못 할 짓이라며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고 갔었다. 그리고 복장 문제는 하복 입는 철이 해결해 주었다.
달포 뒤 여름방학을 앞두고 기말고사를 치르던 중 이번엔 커닝을 하다가 걸리는 대형사고가 발생했다. 커닝하다 걸린 축들은 둘로 나뉜다. 빈도가 높아서 걸리거나, 어쩌다 하기 때문에 서툴러서 걸린 축으로. 나는 당연히 후자에 속했고 공부 잘하는 아이들보다 메모량이 많이 필요했다. 책받침을 증거물로 빼앗긴 채, 당장 부모를 모셔 와야 하는 날벼락에 나는 또 비틀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엔 엄마를 모셔갈까 했지만 내가 아는 아줌마가 어디 있었겠나. 국화빵집 아줌마는 못생겼고 문방구 아줌마는 얼굴이 알려져 있어서 틀렸고 심사숙고 끝에 나는 다시 탁구장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펄쩍 뛰는 아저씨에게 아주 침착하게 애걸했다. 한 번 아버지는 영원한 아버지며 먼저 만났던 그 선생님이 아니고 이번엔 다른 선생님이라는 밝은 소식 위에 작은 포부 하나 얹었다. 내일부터 탁구장에 애들을 좀 몰고 오겠다고...
그는 결국 교무실에 다시 가주기로 했다. 사실 그는 나를 좋아했고 아껴주시던 아저씨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비록 한 달간 탁구장 청소라는 조건이 붙기는 했지만 그것은 천사만이 베풀 수 있는 크나큰 은혜였다. 그런데 일은 전혀 엉뚱한 데서 벌어지고 말았다.
반성문을 써서 가짜 아버지와 함께 들어갔을 때, 선생님과 악수를 나누던 그는 자기 이름을 올바로 대는 사고를 저지르고 말았다.
"박상수입니다.“
성만 강 씨로 바꾸어도 통했으련만 무심코 실수를 한 것이다. 순간적으로 뒷골이 싸늘해지면서 나는 깜깜한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어떡하나. 이 천사가 대리 아버지를 그만 청산하려고 일부러 산통을 깼나 하고 의심도 났지만 그의 얼굴도 파랗게 질려있는 모습으로 보아 실수임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수순은 외길이었다. 여기서 들통나면 부모를 안 모셔 온 것보다 얼마나 처벌이 커질까? 영악스럽게 밀어붙이기로 했다. 최소한 정학을 면하기 위해서는 그 길뿐이었다. 그렇다 외삼촌이라고 우기자.
순진해서 커닝도 제대로 못하고 벼랑 끝에 몰린 내 연기엔 눈물도 조금 비쳤으리라. 어머니는 아버지와 제주도에 가셨기 때문에 외삼촌을 모셔 왔다는 말을 더듬거렸다.
"저, 저기 있잖아요. 사실은 어머니와 아버지는 제......"
"아, 재혼? 그런 아버지셔? 아이구 이리 앉으세요."
선생님께서 먼저 어색한 분위기를 쇄신(?)하고 계셨다. 어떡하면 이 상황이 빨리 끝날까? 선생님의 OVER에 나는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고, 선생님은 의붓아버지를 둔 나를 동정 어린 눈으로 격려까지 해주셨다.
그러나 그때를 계기로 진짜 아버지께 죄송한 마음 잊지 않고, 효성을 다하는 아들이 되고자 노력하게 되었다. 정말 모범생이 되고자 하는 마음만은 항상 놓지 않고 살았다. 그런데 마음먹는 대로 모두 다 우등생이 된다면 세상은 제대로 굴러갈 수 있을까? 개나 소나 모범생인 세상, 얼마나 재미없겠는가.
https://youtu.be/0igZD2_2eX4?si=GneUHI8svzTm6Or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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