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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검은 현무암 해변, 바다의 눈물과 약속 -휘주니-

by 휘주니 2025. 8. 27.

 

검은 현무암의 해변
검은 현무암의 해변

 

제주는 내게 늘 위로와 안식을 주는 섬이다. 특히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곳은 바로 검은 현무암 해변들. 수억 년의 시간을 품고 파도와 부대끼며 빚어진 그 검은 돌들은, 제주의 거친 생명력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눈부신 백사장과는 또 다른, 묵직하면서도 경이로운 아름다움이랄까. 시린 겨울바람에도 흔들림 없이 바다를 지키고 선 그 풍경은, 마치 오랜 삶의 고뇌를 견뎌낸 노인의 얼굴처럼 깊고 고요하다. 하지만 그 고요함 속으로 너무 깊이 발을 들이밀다 보면, 이내 마주하게 되는 불편한 진실이 있다. 틈새마다 끼어 있는 플라스틱 조각들, 형형색색의 어망 부표,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온갖 쓰레기들. 마치 이 아름다운 해변이 흘리는 소리 없는 눈물처럼, 그 모든 것들이 제주의 바다가 감내하고 있는 고통을 증언하고 있는 듯하다.

 

검은 해변의 속삭임, 낯선 이물들


제주의 검은 현무암 해변은 그 자체로 한 폭의 추상화 같다. 날카롭거나 둥근, 혹은 기이한 형태의 검은 돌들이 끝없이 펼쳐지고, 그 위로 부서지는 하얀 파도는 생명의 역동성을 노래한다. 한적한 해변을 거닐며 철썩이는 파도 소리에 귀 기울이노라면, 도시의 찌든 마음이 저절로 정화되는 듯한 기분에 젖는다. 하지만 그 황홀경도 잠시, 시선은 이내 돌 틈 사이에 박혀 있거나 파도에 밀려와 모래 위에 널브러진 낯선 이물들에 꽂히고 만다.

 

어느 날 찾았던 숨겨진 해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검은 돌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선 알록달록한 플라스틱 조각들이 마치 현대 문명의 유적처럼 박혀 있었다. 중국어나 일본어가 적힌 PET병, 다 닳아버린 칫솔, 어딘가에서 떠내려온 듯한 스티로폼 부표들… 심지어는 작은 조각들로 부서진 미세 플라스틱들이 현무암 구멍 속에 박혀 마치 해변의 일부인 양 위장하고 있었다. 눈으로는 쉽게 구분되지 않는 검은색 비닐 조각들은 마치 해변의 어둠 속에 스며들어 바다를 오염시키려는 간첩처럼 보이기도 한다. 제주의 깨끗한 이미지는 이곳에서 여지없이 깨진다. 오염은 멀리 있는 공장 굴뚝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님을, 바로 내 발밑에서 해변은 묵묵히 항의하고 있었다.

 

욕망의 파편들, 바다의 피눈물


이 모든 낯선 이물질들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바다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이 아님은 명확하다.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고 버린 플라스틱 빨대 하나, 어업 활동 중 버려지거나 유실된 폐어망, 선박에서 버려진 쓰레기들, 그리고 폭우에 쓸려 강물을 따라 바다로 흘러든 온갖 오염원들… 이 모든 것들이 한데 모여 제주 바다의 순수함을 깎아먹고 있다. 플라스틱은 썩지 않고 바다를 떠다니며 해양 생물들의 먹이 사슬을 교란하고, 바다거북의 목을 조이고, 고래의 뱃속을 채운다. 이 모든 비극의 근원에는 결국 인간의 끝없는 욕망과 무책임함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제주의 바다는 어찌 보면 우리의 무지와 탐욕이 만들어낸 비극적인 파편들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물고기가 삼키고, 파도가 부수고, 햇빛이 녹여 미세 플라스틱이 되어버린 조각들은 다시 우리의 식탁으로 올라와 우리 몸속으로 들어온다. 바다가 흘리는 눈물은 비단 해변의 쓰레기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병들어가는 해양 생태계 전체의 비명이며, 결국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올 재앙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 제주의 현무암 해변은 강인한 얼굴로 바다를 지키고 있지만, 그 검은 눈동자에는 우리가 버린 쓰레기들이 만들어낸 슬픔이 아롱져 피눈물처럼 고여 있기도 하다.

 

작은 약속들, 큰 변화의 시작


그렇다면 우리는 이 슬픔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 거대한 환경오염 문제 앞에서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너무나 작고 미미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거대한 바다도 한 방울의 물에서 시작되듯, 우리의 작은 약속들이 모여 거대한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 가장 먼저, 불필요한 플라스틱 사용을 줄이는 습관이다. 일회용 컵 대신 개인 텀블러를 사용하고, 비닐봉지 대신 장바구니를 들고, 과대 포장된 상품 구매를 자제하는 것. 이 작은 행동들은 단지 소비 습관의 변화를 넘어, 환경 보호에 대한 개인의 의지를 보여주는 강력한 메시지가 된다.

 

그리고 바다 쓰레기 줍기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다. 해변을 찾을 때마다 봉투 하나라도 좋으니 쓰레기를 줍는 작은 실천을 하는 것. 이런 '플로깅(Plogging)' 활동은 단순히 쓰레기를 치우는 것을 넘어, 버려진 쓰레기를 직접 마주하며 환경 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강력한 경험이 된다. 또한 제주를 찾는 관광객으로서, 머물다 가는 모든 공간에서 쓰레기를 남기지 않고, 분리수거를 철저히 하는 등 최소한의 책임감을 발휘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단순히 '착한 소비'를 넘어 '책임 있는 소비'를 지향하며 환경을 생각하는 기업과 상점을 지지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제주관광 45일째, 이번 여행이 준 가장 큰 변화는 내가 플로깅을 시작했다는 거다. 많은 양을 줍진 못했지만 시작이 반이란 얘기와 주변에 작은 울림 정도는 나누지 않았을까. 그냥 시늉이지만 이미지는 던지고 다녔다고 생각해 본다. 주운 양보다 훨씬 큰 만족감이 플로깅의 자부심이다.

 

다시 푸른 약속을 향하여


제주의 바다는, 섬사람들의 삶의 터전이자 우리의 소중한 자연유산이다. 아름다운 검은 현무암 해변은 단순한 관광 명소가 아니라, 거친 파도와 싸워 이긴 생명의 강인함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박물관과 같다. 이 귀한 존재를 우리가 계속해서 누리려면, 더 이상 바다에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된다. 작은 약속들, 즉 개인의 의식 변화와 실천이 모여 큰 물결을 이룰 때 비로소 제주의 바다는 본연의 푸른빛을 되찾고, 그 바다가 품은 생명들이 다시 평화롭게 숨 쉴 수 있을 것이다.

 

바다의 눈물은 우리에게 침묵으로 호소한다. 이제 더 이상 방관하지 말고, 이 상처 입은 대자연에게 치유의 손길을 내밀어 달라고. 우리가 제주에 줄 수 있는 가장 큰 약속은 어쩌면 거창한 환경 정책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부터 변하겠다는 작은 결심, 그리고 그 결심을 꾸준히 실천하는 우직함이 아닐까.

 

제주의 바람과 오름, 그리고 검은 해변이 품은 생명력처럼, 우리도 강인한 의지로 환경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바다와 맺는다면, 제주는 영원히 푸르고 아름다운 섬으로 남아 우리에게 변함없는 위로를 안겨줄 것이다. 그 약속의 시간이 바로 지금이다. '바로 지금'이 살아있는 노래 하나 붙여본다. 대학가요제 대상곡인데도 나는 곡명을 여지껏 '바로 지금'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병태처럼. 유열의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 이 노래는 태어날 때 '바로 지금'이라는 제목으로 나왔다면 더 강하고 임팩트 있는 노래로 남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