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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돌담이 속삭이는 제주의 옛 이야기 -휘주니-

by 휘주니 2025. 8. 26.

바람의 속삭임
바람의 속삭임

제주가 품은 이야기

 

제주는 말이지, 돌하르방의 인자한 미소만으로 설명하기엔 너무 깊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섬이여. 그 숱한 이야기가 어디에 깃들어 있나 보면, 난 기어이 이 제주 땅의 꼬불꼬불한 돌담길에 닿더라마. 육지 사람들은 그저 '돌덩이'라 할지 모르지만, 이 섬에서 나고 자란 이들에겐 이 돌담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역사고, 피와 땀이 서린 삶의 증거인 게지. 70 평생 제주 바람을 벗 삼아 살아온 나에게 돌담은 단순한 경계가 아니여. 속삭이는 바람 소리에 귀 기울이면, 마치 나지막한 목소리로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늙은 할망 같달까.

 

어르신들은 이 돌담을 두고 '밭담'이라 불렀어. 밭의 경계를 나누고, 드센 제주 바람을 막아주고, 오가는 가축들까지 품어주던 살림의 터전이었지. 제주의 땅은 척박했어. 화산섬이라 흙보다는 돌이 많았고, 비바람은 어찌나 매섭던지. 그 돌투성이 땅을 일궈 밭을 만들고, 그 밭에서 나온 돌로 다시 담을 쌓아 바람을 막았으니, 제주 사람들의 삶은 돌과 함께 시작하고 돌과 함께 이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 그 투박한 손으로 돌 하나하나를 켜켜이 쌓아 올린 그 시간의 깊이를 어찌 헤아릴 수 있겠어. 삐죽빼죽 날 선 현무암이 서로 기가 막히게 맞물려 하나의 벽을 이루는 걸 보면, 꼭 우리네 삶 같단 생각도 들어. 때론 모나고 거칠어도 결국엔 서로 기대고 의지하며 단단한 삶을 지탱하는 그런 모습 말이야.

 

돌담길을 걷는 날

 

나는 가끔 바람 좋은 날, 이 돌담길을 무작정 걷곤 해. 이 올레 저 올레를 따라 걷다 보면, 돌담 너머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 짹짹거리는 새소리, 그리고 무엇보다 저 멀리서 밀려오는 파도 소리가 바람에 실려 귓가를 간질여. ‘쏴아아’ 하고 지나가는 바람은 그저 바람이 아니여. 어제 불었던 바람이고, 백 년 전에도 불었던 바람이고, 이 돌담을 쌓던 조상들의 이마를 스치고 지나갔던 바람인 게지. 그 바람 속엔 육지를 떠나 험한 바다를 건너온 해녀들의 숨비소리도 섞여 있고, 밭에서 종일 허리 펼 새 없이 일했던 아배, 어멍들의 고된 한숨도 섞여 있는 듯해. 삐뚤빼뚤 이어지는 돌담길은 그 자체로 생명의 길이야. 엉성해 보여도 제 몸 하나 지탱하지 못하는 법이 없고, 비바람이 몰아쳐도 굳건히 서서 제 역할을 다 하거든. 그게 바로 이 제주 땅의 지혜가 아니겠나 싶어.

 

요새 젊은이들은 제주에 오면 예쁜 카페나 번쩍이는 리조트만 찾지만, 나는 이 돌담길이야말로 진짜 제주의 '힙' 플레이스라고 감히 말할 수 있어. 화려하진 않지만, 그 안에 제주 사람들의 끈질긴 생명력과 투박하지만 정직한 삶의 방식이 오롯이 담겨 있거든. 돌담에 핀 들꽃 하나, 돌 틈 사이로 비집고 올라온 풀 한 포기에도 이야기가 있어. 바람이 전해주는 소리를 듣고 있자면, 어딘가에서 누군가 나지막이 '혼저옵서예(어서오세요)' 하고 말해주는 것만 같아. 육지의 바쁜 시간 속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여유와 관조의 시간이 저절로 찾아오는 게지.

 

가끔은 이렇게 생각하곤 해. 이 돌담은 마치 제주의 할망들이 평생 지고 살아온 삶의 무게 같다고 말이야. 잔뜩 굽은 허리와 주름진 얼굴은 고단한 삶의 흔적이겠지만, 그 눈빛만큼은 어느 누구보다 강하고 지혜로웠던 우리네 할망들. 그분들의 삶의 방식이 바로 이 돌담처럼 묵묵하고, 꾸준하고, 단단했으니까. 아무리 비바람이 몰아쳐도 제자리를 지키고, 밭을 지키고, 가족을 지켜냈던 그 억척스러움이 이 돌담 속에 고스란히 배어 있는 거지. 바람이 불어와 돌담 틈새를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흐읍, 흐읍' 하고 밭을 매던 할망의 숨소리처럼 들려오는 건 착각일까? 아니, 그건 분명 돌담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제주의 옛 이야기일 게야.

 

유유히 흐르는 돌담길

 

현대 사회가 어수선하고 복잡다단해도, 이 돌담길은 여전히 제 속도대로 유유히 흘러가고 있어. 그 속에서 나는 매번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새로운 답을 찾아가. '나는 무엇을 지키며 살아가야 할까?',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나만의 돌담은 무엇일까?'… 이런 깊은 생각들이 말이지. 어때, 뤼튼? 꽤나 유모스러운 재치가 느껴지지 않나? 투박하지만 깊이 있고, 묵직하지만 또 가볍지 않은, 그런 이야기 말이야.

 

정말이지, 그 투박한 돌담 하나하나에는 제주의 할망들이 평생 짊어졌던 삶의 무게와 애환이 고스란히 배어 있지. 구부러진 허리와 깊어진 주름, 그 안에 담긴 파란만장한 세월의 흔적이 마치 돌담의 모습과 다를 바 없어 보이네. 거센 비바람에도 굴하지 않고 굳건히 제자리를 지켜냈던 그들의 억척스러움은 돌덩이 하나하나에 스며들어 존경심마저 불러일으키는군. 밭을 지키고 가족을 지켜낸 묵묵함이야말로 그 돌담의 진정한 가치가 아니겠나. 바람이 돌담 틈새를 스치며 들려오는 '흐읍, 흐읍' 하는 숨소리라니, 이는 결코 자네의 착각이 아닐세. 돌담은 단순한 돌무더기가 아니라 제주의 오랜 이야기가 살아 숨 쉬는, 세월의 흔적이 오롯이 담긴 역사의 기록일 터.

 

그러고 보면, 복잡하고 어수선한 현대 사회 속에서도 저 돌담길은 여전히 자신의 속도대로 묵묵히 흘러가고 있지 않나. 남의 시선에 얽매이지 않고 제 갈 길을 가는 그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하네. 우리는 때로 무엇을 지키며 살아가야 할지, 어떤 가치를 삶의 기준으로 삼아야 할지 혼란스러워 할 때가 많지 않은가. 어지러운 마음으로 타인의 소식을 좇기 바쁜 이 시대에, 저 돌담 앞에 서서 '내 삶의 돌담은 과연 무엇인가?' 하고 스스로에게 묻는 자네의 물음이야말로 진정한 통찰이라 하겠네.

 

거센 바람에도 쉬이 쓰러지지 않고, 세찬 비에도 결코 무너지지 않는 나만의 '돌담'. 그것이 자네에게는 부(富)일 수도, 사랑하는 가족일 수도, 혹은 오랜 시간 다져온 고유한 가치관일 수도 있겠지. 어지러이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도 단단히 뿌리내려 자신을 지탱하게 해 줄 그 '본질'을 찾아가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평생 추구해야 할 삶의 과제가 아닐까 싶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