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월은 어느새 너무 유명해졌다.
바다 앞 뷰 카페마다 차들이 밀려 있고,
라떼 한 잔을 위해 줄을 서야 하는 곳이 되었다.
그곳의 매력을 부정할 순 없지만,
제주에 몇 번 다녀온 사람이라면 어느 순간,
사람보다 숲이 그리워지는 시점이 온다.
그럴 때 나는 저지리로 간다.
애월의 옆 동네,
지도에서 찾으려면 고개를 갸웃해야 하는 그 조용한 마을.
관광 코스엔 빠지기 십상이고,
택시는 도로명 대신 ‘그 삼거리 지나 오른쪽’이라 말해야 겨우 도착하는 그런 곳이다.
간판 없는 카페, 하루나무
처음 '하루나무'를 찾았을 땐,
이 근방을 세 바퀴쯤 돌았던 기억이 난다.
내비게이션에 나오는 주소는 정확하지 않았고,
작은 표지판 하나 없이 길모퉁이에 그냥 존재하는 이 집을
나는 카페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마당 안으로 조심스레 발을 디뎠을 때,
‘혹시 민가 아니야?’ 하는 불안감이 들었다.
그런데 나처럼 망설이는 듯한 손님이 평상에 앉아
수박주스를 홀짝이며 책을 읽고 있었다.
그제야 여기가 맞는구나 싶었다.
카페 이름은 입구에도 없다.
입간판도, 메뉴판도, 와이파이 비밀번호도 없다.
이곳은 ‘없음’으로 가득한 공간이었다.
그런데 그 부재가 신기하게도 충만했다.
하루가 천천히 익는 곳
내가 앉은자리는
곶자왈 소나무와 고사리에 둘러싸인 나무 평상이었다.
발아래는 흙바닥, 머리 위로는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햇빛.
수박 주스는 유리병에 담겨 나왔고,
빨대는 종이도 플라스틱도 아닌 대나무였다.
모기향이 은근히 피어오르고,
흐린 커튼이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고,
가끔 들리는 새소리에 고개를 들어 숲을 보게 된다.
에어컨도 없고,
시끄러운 음악도 없고,
사장님의 잔잔한 미소만이 있다.
그분은 “시끄럽지 않아 좋지요?” 하고 웃으며 물으신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렇다.
이곳은 소음의 부재가 아닌, 평온의 존재로 가득했다.
SNS보다 마음을 열게 되는 장소
'하루나무'에선 이상하게도 스마트폰을 잘 꺼내지 않게 된다.
신호도 약하고 와이파이도 없으니 자연스럽게 손에서 멀어진다.
대신 책을 꺼내 읽는다.
문장 하나를 여러 번 음미하고,
문득 멍하니 창밖을 바라본다.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한참 흐른다.
그 시간 동안
나는 ‘해야 할 일’보다 ‘느껴야 할 마음’에 집중하게 된다.
그건 어떤 면에서 요즘 시대에선 가장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하루나무에선 그게 어렵지 않다.
이곳은 SNS보다 내 속마음과 연결되는 통로가 더 활짝 열려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다시 나갈 용기를 얻다
언제부턴가 내 일상은
‘빠름’을 예찬하며 돌아갔다.
빠른 회신, 빠른 처리, 빠른 이동.
느림은 무능으로 취급되었고,
잠깐의 멍 때림도 용납되지 않는 나날이었다.
하지만 하루나무에서 보낸 몇 시간은
그 모든 빠름에서 잠시 발을 빼게 해 줬다.
시간은 여전히 흐르고 있었지만,
내 마음은 멈춰 서 있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괜찮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충분했다.
그날, 카페를 나오며
사장님은 말없이 손을 흔드셨다.
나는 그 손짓이 '안녕'이 아닌
‘오늘 하루 잘 보내셨어요?’라고 묻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애월 말고, 저지리
이제 누가 제주에 간다고 하면
나는 애월보단 저지리를 말한다.
곶자왈 숲길과, 하루나무의 평상,
수박 주스와 모기향, 그리고 말을 아끼는 미소가 있는 그곳.
그곳에서의 하루는
나에게 ‘쉬어도 괜찮다’는 허락이었다.
그리고 그 허락은
일상으로 돌아온 지금도 여전히 나를 지켜주고 있다.
✍️ 하루나무는 네이버지도에도 정확한 위치가 나오지 않습니다.
“제주시 한경면 저지리 3090-1”쯤으로 찾아가면 됩니다.
하지만 정확한 좌표보다 중요한 건,
그 느림과 여유의 마음을 품고 찾아가는 길이라는 점입니다.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윤여선의 土曜斷想 : 구두닦이 (0) | 2025.07.26 |
---|---|
냉장고에 들어가고 싶은 날, 이런 음식 어때요? -휘준- (6) | 2025.07.25 |
여름휴가 대신, 내 방을 리조트로 만드는 법 -휘준- (3) | 2025.07.23 |
죽녹원과 메타세쿼이아길 -휘준- (2) | 2025.07.21 |
자전거 타고, 아이스크림 들고: 우도에서의 반나절 -휘준- (2) | 2025.07.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