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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양이와 꿩이 –휘준- 겨울이었지만 참 포근한 날이었습니다. 닭 친구 넷이 아침 일찍 모여 테니스를 치기로 했습니다.그런데 약속한 아침엔 더 부지런한 꿩친구가 먼저 나와서 친구 닭과 열심히 연습을 하고 있었습니다.세상에서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모습은 참 좋은 볼거리여서늦게 온 닭 셋은 땀에 젖은 두 친구와 마당에 흩어진 노랗고 보드라운 공들을 바라보며막 퍼지기 시작한 햇살을 먹고 있었습니다. 예쁜 공들이 라켓트를 떠나 꼭 병아리 떼처럼 사방으로 뛰어다니는 모습은 정말 아름다운 아침을 만들었습니다.꿩이 큰 소리로 불렀습니다."얘들아! 빨리 들어와 게임하지 않고 뭐 하니?"?"닭 세 친구가 코트에 들어서면서, 하얀 닭이 꿩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먼저 시합하라고?"그러자 꿩은 갑자기 화난 얼굴로 소리쳤습니다."너희 닭 넷이서 먼저.. 2025. 3. 21.
인연 -피천득- 因 緣 -피천득-지난 사월 춘천에 가려고 하다가 못 가고 말았다. 나는 성심여자 대학에 가보고 싶었다. 그 학교에 어느 가을 학기, 매주 한 번씩 출강한 일이 있다. 힘든 출강을 한 학기 하게 된 것은, 주수녀님과 김수녀님이 내 집에 오신 것에 대한 예의도 있었지만 나에게는 사연이 있었다. 수십 년 전 내가 열일곱 되던 봄, 나는 처음 동경(東京)에 간 일이 있다. 어떤 분의 소개로 사회 교육가 미우라(三浦) 선생 댁에 유숙을 하게 되었다. 시바꾸 시로가네(芝區白金)에 있는 그 집에는 주인 내외와 어린 딸 세 식구가 살고 있었다. 하녀도 서생도 없었다. 눈이 예쁘고 웃는 얼굴을 가진 아사코(朝子)는 처음부터 나를 오빠같이 따랐다. 아침에 낳았다고 아사코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하였다. 그 집 뜰에는 큰.. 2025. 3. 20.
가장 오래 기다린 찬스 -휘준- 가장 오래된 망설임내가 기다리는 찬스는 죽을 때까지 안 올지도 모른다.은행 신용카드와 내가 인연을 맺은 지가 벌써 45년쯤 된다.지금은 신용카드 없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예전엔 확실한 신분과 소득을 증명해야 신용카드를 사용할 수 있었다.그래서 80년대까지는 카드에 신분 과시 효과도 있었다고 기억된다.​신용카드와 따로 생각할 수 없는 현금지급기.출시 초년부터 사용했기 때문에 서툰 사람들 앞에서 익숙하게 사용해 왔으며,으쓱한 기분으로 그들에게 사용법을 가르쳐 주기도 했었다.그러나 그 현금지급기를 나는 아직도 믿지 못한다.​사람의 망설임은 짧게는 순간이고 길어야 며칠이면 끝난다.그러나 나는 30여 년간 망설임을 버리지 못한 게 하나 있다.그것은 현금지급기 앞에서 꺼낸 돈을 세어보는 일이다.돈이 혹시 모자라면 .. 2025. 3. 19.
변비를 못이기고 대학 병원 응급실로, 치료비 26만 원 -휘준- 벌써 작년 겨울 기억이 되었네요. 2024년 1월 27일 토요일 8시, 금정역에 나갔더니 네 사람이 모였습니다. 평택역까지 급행 전철로 약 40분 이동, 평택역에서 510번 버스 타고, 약 50분 이동하여 영인산 들머리에 도착했습니다. 영인산 자연휴양림 입구부터 아이젠을 차며, 화장실을 찾아보았으나 없었습니다.​​정상 쪽 공원에서 반가운 화장실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배변엔 실패. 영인산은 봉우리가 4~5개 있었는데 첫 봉우리(상투봉)에서 하산을 결심했습니다. 일행에겐 지름길로 뒤따르겠다고 하고서 다시 그 화장실에 들렀으나 실패, 등산할 마음이 싹 가시고 찜찜해서 미련 없이 하산 결정. 이제 집까지 가는 길이 걱정되었습니다. 택시 타면 집까지 80분, 교통비 약 10만 원. 대중교통은 집까지 약 3시간 걸.. 2025. 3. 18.
(12) 미술 선생님과 깨눈 -휘준- 어느 해인가 5월 15일, 고교 동창 여남은이 모였었다.한참을 떠들다 누군가 스승의 날임을 일깨웠을 때, 깨눈의 부음(訃音)이 들렸다."깨눈 알지? 어제 죽었대."고교 선생이 된 친구, 메뚜기가 술잔을 주며 말했다.맞은편 세모가 받았다. 깨눈이라! 공납금 독하게 받아내던 그 선생? 깨눈은 눈이 몹시 작았다. 덩치는 큰데 눈은 참깨 만한 남자.인상도 험악했는데 그는 나의 중학 시절 미술 선생이었다.미술 숙제가 상상화 한 점씩이었는데, 숙제 검사를 하던 깨눈이 대뜸 물었다."너, 이거 베꼈지?""제가 혼자 그린 건데요." '상상화'는 말 그대로 상상해서 그리는 것인데 깨눈은 어디선가 본 그림이라는 것이다.깨눈은 깨눈을 크게 뜨며 두 번이나 물었다. 정말이냐고.까닭을 모르는 나는 같은 대답을 할 수밖에.그때 .. 2025. 3. 17.
그믐달 -나도향- 나는 그믐날을 몹시 사랑한다. 그믐날은 요염하여 감히 손을 댈 수도 없고, 말을 붙일 수도 없이 깜찍하게 예쁜계집 같은 달인 동시에 가슴이 저리고 쓰리도록 가련한 달이다. 서산 위에 잠깐 나타났다 숨어버리는 초승달은 세상을 후려 삼키려는 독부(毒婦)가 아니면철모르는 처녀 같은 달이지마는, 그믐달은 세상의 갖은 풍상을 다 겪고,나중에는 그 무슨 원한을 품고서 애처롭게 쓰러지는 원부(怨婦)와 같이 애절하고 애절한 맛이 있다. 보름의 둥근 달은 모든 영화와 끝없는 숭배를 받는 여왕(女王)과 같은 달이지마는,그믐달은 애인을 잃고 쫓겨남을 당한 공주와 같은 달이다. 초승달이나 보름달은 보는 이가 많지마는, 그믐달은 보는 이가 적어 그만큼 외로운 달이다.객창한등(客窓寒燈)에 정든 임 그리워 잠 못 들어 하는 분이나.. 2025. 3.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