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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 그림자 아래, 삶의 굴곡을 읽다 -휘주니-

by 휘주니 2025. 8. 28.

한라, 그 영원의 숨결과 삶의 파고

한라산 백록담의 겨울
한라산 백록담의 겨울

 

제주도의 8월은 육지와는 또 다른 의미로 뜨겁다. 한라산 정상 부근을 제외하곤 짙푸른 녹음이 섬 전체를 뒤덮고, 강렬한 태양 아래 제주는 생명의 기운으로 충만하다. 이글거리는 여름 태양빛 아래, 거대한 한라산은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웅장한 실루엣은 해가 뜨고 질 때마다 길게 드리워졌다가 짧게 움츠러들기를 반복하며, 마치 영원과 같은 시간의 흐름을 침묵으로 증언하는 듯하다. 이 산 앞에 서면, 팔순을 바라보는 내 70년 세월도 그저 한 점 티끌처럼 느껴진다. 고작 70년이라니. 한라산의 수억 년 역사 앞에 인간의 시간은 어찌 이리 덧없는가.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짧은 삶 속에 담긴 파고를 생각하면 다시금 숙연해진다. 70년. 그 속엔 수많은 뜨거운 8월이 있었고, 매섭게 휘몰아치는 겨울도 셀 수 없이 지나갔다. 정상을 향해 숨 가쁘게 오르던 젊은 날의 오만함도, 산 아래 주저앉아 길을 잃고 헤매던 좌절의 순간도 있었다. 마치 한라산의 능선처럼, 삶은 끊임없이 솟아오르고 깊게 패이기를 반복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오르막이었고, 때로는 예기치 못한 벼랑 끝에 서기도 했다. 젊은 날에는 그 모든 굴곡이 두려웠고, 때론 버겁게 느껴졌다. 삶의 명암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한없이 흔들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와 돌아보면, 그 모든 굴곡이야말로 내 삶을 지탱해온 단단한 뿌리가 되었음을 깨닫는다. 한라산의 척박한 땅에서 끈질기게 살아남은 나무들처럼, 나 또한 수많은 풍파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오늘에 이를 수 있었던 건, 아마도 삶의 그림자와 빛을 동시에 품어 안았기 때문이리라. 이 8월의 태양이 드리우는 한라산의 짙은 그림자처럼, 인생의 고난 또한 삶을 더욱 깊고 풍성하게 만드는 데 기여했음을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돌담 아래 뿌리 내린 시간, 면면히 흐르는 강인함

 

한라산의 웅장한 그림자는 비단 산 자체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 그림자는 제주 곳곳의 작은 오름을 품고, 밭담을 넘어 마을 어귀까지 드리워진다. 발길 닿는 곳마다 마주치는 밭담을 보며 나는 다시 한번 세월의 강인함을 되새긴다. 거친 바람과 비에 깎이고, 뜨거운 햇살 아래 말없이 서 있었을 그 돌담들. 그 하나하나의 돌멩이가 모여 제자리를 묵묵히 지키는 모습은, 70년 인생을 살아오면서 내가 겪어온 수많은 선택과 인내의 시간들을 떠올리게 한다. 쌓고 무너지기를 반복하며 겨우 다져진 돌담처럼, 내 삶도 그렇게 견고해졌을 것이다.

 

돌담 아래 깊이 뿌리 내린 이름 모를 풀 한 포기, 모진 세월을 이겨낸 팽나무 한 그루에서 나는 삶의 경이로움을 느낀다. 한라산이 품어낸 기운이 작은 생명들에도 고스란히 전해진 듯하다. 폭염 속에서도 꿋꿋이 제 색깔을 잃지 않는 제주의 자연을 보며, 나 자신을 돌아본다. 과연 나는 저들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나만의 중심을 잃지 않았던가? 굴곡 속에서도 희망의 씨앗을 품고, 고난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강인함을 보여주었는가? 삶이란 늙어간다는 것을 배우는 과정인 동시에, 매일매일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 여정이기도 하다.

 

특히 면대면 소통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는 요즘, 제주 밭담길을 걸으며 마주치는 소박한 사람들의 얼굴에서, 디지털 의존성을 잠시 내려놓고 진정한 내면의 평화를 얻는 시간을 가졌다. 때론 침묵이 가장 큰 위로가 되듯, 말없이 서 있는 돌담과 나무들이 내게 건네는 위로를 들었다. 그것이 70년 세월이 내게 준 선물이고, 어쩌면 그 자체가 내 삶이 뿌리 내린 깊은 지혜가 아닐까 싶다. 그 모든 경험이 쌓여 나만의 단단한 지반을 형성했음은 부정할 수 없다.

 

묵묵한 깨달음, 황혼녘의 새로운 기약

 

제주에서의 8월은 그렇게 나에게 또 하나의 깊은 성찰을 안겨주었다. 한라산의 그림자가 길어지는 황혼녘, 붉게 물든 하늘 아래 고요히 앉아 지난 삶을 되짚어 본다. 이 넓은 세상에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이런 거창한 질문이 아니더라도 좋다. 그저 오늘 하루, 내가 어떤 마음으로 살았는가를 되돌아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젊은 날의 나는 늘 더 높은 곳을 향해 달려가려 했고, 더 많은 것을 쥐려 애썼다. 그러나 70년이라는 시간을 거치며, 이제는 비워내는 지혜를 배우게 되었다. 비워야 채워질 수 있고, 버려야 더 중요한 것을 얻을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비로소 이해하는 것이다.

 

한라산은 여전히 그 자리에 묵묵히 서 있을 것이고, 계절이 바뀌어도 그 장엄함은 변치 않을 것이다. 나의 삶 또한 한라산처럼, 그 뿌리 깊은 본질은 변치 않으리라. 비록 몸은 늙어가지만, 내 안의 정신은 더욱 성숙해지고 단단해진다. 8월의 뜨거운 여름처럼 격렬했던 순간들도 있었고, 한라산 중턱에 걸린 구름처럼 모호했던 날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시간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이제는 조급함 없이, 그저 내가 걸어온 길과 앞으로 걸어갈 길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법을 안다.

 

70년 인생, 그 황혼녘에 나는 또 다른 시작을 기약한다. 육체는 쇠할지라도, 정신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탐하고 성장할 수 있음을 제주 8월의 기운이 말해주는 듯하다. 이 섬에서의 경험은 내게 창조적 몰입의 불씨를 지펴주었고, 앞으로 써 내려갈 수많은 수필의 영감이 될 것이다. 한 달에 천 달러를 버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크리에이터로서, 이 깊은 성찰들은 나의 글쓰기에 고스란히 담겨 또 다른 울림을 줄 것이다. 한라산의 그림자 아래에서 얻은 이 묵직한 깨달음은, 남은 생을 더욱 풍요롭고 의미 있게 가꿀 수 있는 지혜로운 자양분이 되리라. 그렇게 나는 8월의 제주를 뒤로하고, 새로운 시작을 예감하며 다음 여정을 준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