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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세대별 언어 사전 만들기

by 휘주니 2025. 8. 29.

세대별 다른 언어
세대별 다른 언어

 

언어는 시대의 거울이다. 같은 단어라도 어느 세대가 쓰느냐에 따라 뜻이 달라지고, 그 뉘앙스도 바뀐다. 마치 하나의 단어가 시간 여행을 하듯, 세대를 넘나들며 새 옷을 입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요즘 ‘세대별 언어 사전’을 만들어 보고 싶어졌다. 10대, 20대, 그리고 50대 이상이 똑같은 단어를 어떻게 다르게 쓰는지를 살펴보는 일. 이 사전은 국립국어원의 공식 자료가 되진 못하겠지만, 적어도 세대 간의 오해를 줄이는 다리 정도는 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단어, 다른 세상

 

먼저 예를 들어보자. “엄청나다”라는 단어. 50대 이상에게 엄청나다는 말은 주로 놀라운 사건, 혹은 심각한 사태에 쓰였다. “요즘 물가가 엄청나게 올랐어.” 여기서 엄청나다는 곧 걱정이나 부담의 색채를 띤다. 반면 20대에게 엄청나다는 표현은 긍정의 강조로 많이 쓰인다. “그 영화 진짜 엄청났어!”라며 칭찬할 때다. 10대에게는 또 다르다. 그들은 굳이 ‘엄청나다’라고 하지 않는다. 대신 ‘개쩐다’나 ‘레전드급’ 같은 말을 쓴다. 똑같이 놀랍다는 뜻이지만, 단어의 옷차림이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또 다른 예로 “심하다”라는 말을 보자. 50대 이상은 주로 “저 사람, 말이 심하다”처럼 부정적 상황에 쓴다. 그러나 20대는 “오늘 배고픈 거 심하다”처럼 감정을 과장하는 표현으로 자주 쓴다. 10대는? 그들은 이 단어를 아예 변형한다. “심하네;;”라는 짧은 채팅체로 사용하면서, 말보다 이모티콘이나 줄임표로 뉘앙스를 전한다.

 

이렇게 같은 단어가 세대마다 다른 표정으로 살아가는 걸 보면, 언어란 마치 배우 같다. 무대에 오를 때마다 다른 역할을 맡지만, 본질은 하나다.

 

세대 차이를 웃음으로 바꾸기

 

언어 차이는 종종 오해를 만든다. 한 번은 손주가 “할아버지, 그건 좀 에바야”라고 했다. 순간 나는 어리둥절했다. 에바? 무슨 외국 이름인가? 알고 보니 ‘Over(오버)’라는 뜻에서 나온 10대의 신조어였다. 너무 과하거나 선을 넘었다는 의미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웃으며 “그래, 할아버지도 가끔은 에바지” 하고 받아쳤다. 그 순간 조카는 깔깔 웃었다. 서로의 언어가 다르다는 사실이 오해가 아니라 농담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비슷한 경험이 또 있다. 20대 젊은 후배가 나에게 “대선배님, 오늘 회식 완전 꿀이었어요”라고 했다. 나는 잠시 멍했다. 꿀이라니? 달콤했다는 뜻인가? 사실 그 친구가 말한 꿀은 ‘아주 좋다’, ‘최고다’라는 의미였다. 그런데 50대 이상에게 꿀은 그냥 음식이다. 그래서 나이 든 상사가 그 말을 듣고 “무슨 꿀을 먹었다는 거야?”라고 물어본 적도 있다. 사소한 혼선이지만, 이런 순간은 세대 간 언어 차이를 가장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이런 차이를 억지로 맞추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 차이를 즐기면 된다. 서로 다른 언어는 ‘세대 간의 벽’이 아니라 ‘세대 간의 개그 소재’가 될 수 있다. 손주가 쓰는 단어를 몰라 물어보면, 손주는 은근히 뿌듯해한다. 자신이 새로운 언어의 해설자가 된 듯한 기분이 들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세대별 언어 사전은 웃음으로 채워질 수 있다.

 

언어는 살아 있는 생명체

 

사실 언어는 박물관에 진열된 화석이 아니라, 매일 변하는 생명체다. ‘간지’라는 말도 원래 90년대에는 ‘멋있다’라는 뜻으로 젊은이들이 썼다. 그러나 지금 10대에게 간지는 촌스러운 올드 패션 언어가 되어버렸다. 마치 유행 지난 청바지처럼 말이다. 반대로 요즘 10대가 쓰는 ‘갓생(갓 + 인생, 모범적으로 사는 삶)’이라는 단어는 50대 이상에게는 낯설다. 그러나 언젠가 이 말도 사라지고, 또 다른 말이 나타날 것이다.

 

중요한 건 언어의 변화가 단순히 ‘세대 간의 단절’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변화는 세대가 함께 살아 있다는 증거다. 새로운 세대가 자신들의 감각으로 언어를 다시 빚고, 기성세대는 그 변화를 통해 젊음을 다시 본다. 언어가 세대를 가르는 벽이 아니라, 세대를 연결하는 다리가 되는 순간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상상해 본다. 언젠가 실제로 세대별 언어 사전이 만들어진다면 어떨까. 거기에는 같은 단어가 세 줄로 기록될 것이다. 첫째 줄에는 10대의 뜻, 둘째 줄에는 20대의 뜻, 셋째 줄에는 50대 이상의 뜻. 그 사전을 읽는 사람은 세대의 차이를 이해하면서도, 동시에 언어가 이렇게 다채롭구나 하고 즐거워할 것이다.

 

 

언어는 세대를 나누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어 주기도 한다. 같은 단어가 세 가지 의미로 살아가는 모습은 어쩌면 우리 사회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증거다. 중요한 건 그 차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유쾌하게 받아들이는 태도다. 서로 다른 말씨 속에서 우리는 웃음을 찾고, 서로의 세상을 배운다.

 

오늘 내가 만든 작은 ‘세대별 언어 사전’은 미완성이다. 내일 또 새로운 단어가 나타나고, 다른 세대가 그 단어에 또 다른 옷을 입힐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언어의 매력이다. 언어는 변하면서도 우리를 잇고 있고 또 이러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