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오래된 망설임
내가 기다리는 찬스는 죽을 때까지 안 올지도 모른다.
은행 신용카드와 내가 인연을 맺은 지가 벌써 45년쯤 된다.
지금은 신용카드 없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예전엔 확실한 신분과 소득을 증명해야 신용카드를 사용할 수 있었다.
그래서 80년대까지는 카드에 신분 과시 효과도 있었다고 기억된다.
신용카드와 따로 생각할 수 없는 현금지급기.
출시 초년부터 사용했기 때문에 서툰 사람들 앞에서 익숙하게 사용해 왔으며,
으쓱한 기분으로 그들에게 사용법을 가르쳐 주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 현금지급기를 나는 아직도 믿지 못한다.
사람의 망설임은 짧게는 순간이고 길어야 며칠이면 끝난다.
그러나 나는 30여 년간 망설임을 버리지 못한 게 하나 있다.
그것은 현금지급기 앞에서 꺼낸 돈을 세어보는 일이다.
돈이 혹시 모자라면 어쩌지? 이 돈을 받는 사람에게 실수하지 않으려면 세어봐야 돼.
기계도 실수가 있는 법인데 한두 장 더 나올 댄 어떡할까?
여기 있습니다. 20만 원 세어보세요.
창구에선 은행원이 돈을 내주면서 세어보라고 하기 때문에,
체면 생각 없이 세어보는데 기계 앞에선 망설여지는 때가 많다.
쪼잔해 보일까 봐 안 세는 척하며 나중에 세어본 것까지 합치면 수천 회는 될 텐데
한 장도 더 나오거나 덜 나온 적이 없다.

'혹시 한 장 덜 오면 따지고, 더 오면 그냥 가야지 후후후'
장수가 많을수록 세어보는 노력이 만만찮지만 번번이 헛수고다.
기계는 한 번도 내 기대를 채워준 적이 없지만 나는 또 세어볼 것이다.
더 나온 돈이 만 원이라면 주머니에서 한 장 더 보태 아내를 불러낼 것이다.
공돈으로 먹는 밥맛이 꿀맛이라는데 그 맛을 나는 더 늙어서도 기다릴 것 같다.
언젠가 한 번쯤은 내 흑심을 채워주겠지, 현금 현금 현금지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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