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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의 여행기

by 휘주니 2025. 8. 29.

소리의 여행기
소리의 여행기

 

도시는 눈으로만 기억되지 않는다. 귀로도, 그리고 마음으로도 기억된다. 사람마다 여행의 흔적을 남기는 방식은 다르다. 어떤 이는 사진을 찍고, 어떤 이는 냄새를 기록한다. 나는 조금 다르다. 내가 길 위에서 담아 두는 것은 소리다. 소리는 사라지는 듯하지만 묘하게 오래 남는다. 눈을 감아도, 어떤 소리들은 내 안에서 다시 울린다. 그래서 나는 오늘 하루를 ‘소리의 여행기’로 기록해 본다.

 

시장의 외침에서 시작된 아침

 

아침 산책길에 전통시장을 지난다. 그곳에는 언제나 사람들의 목소리가 가득하다. “오늘 참외 달아드려요, 아주 달아요!” 상인의 외침은 마이크도 없이 시장 전체를 울린다. 옆 가게에서는 “오백 원만 더!” 하는 흥정의 목소리가 섞여 들려온다.

그 소리들은 단순히 장사를 알리는 소리가 아니다. 거기에는 삶의 활력이 묻어 있다. 목청을 돋워 외치는 소리는 하루를 버티는 힘이고,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는 간절함이다. 나는 그 소리들을 들으며 내가 아직도 살아 있는 도시의 한복판에 서 있음을 느낀다. 시장은 눈으로 보지 않아도 귀로만 충분히 풍경이 완성된다.

 

어느 노점 앞에서는 라디오 소리가 흘러나왔다. DJ의 경쾌한 목소리가 튀어나오고, 뒤이어 흘러나온 옛 노래가 시장의 소음과 뒤섞인다. 사람들의 발걸음, 과일을 담는 비닐봉지의 바스락거림, 그리고 돈을 세는 잔잔한 동전 소리까지 합쳐져 하나의 커다란 합창이 된다. 시장의 소리는 어수선하면서도 기묘하게 질서가 있다.

 

시장 골목을 벗어날 즈음, 닭이 울음소리를 냈다. 도심 한복판에서도 들을 수 있는 닭 울음은 낯설면서도 정겹다. 마치 농촌의 한 자락이 시장 속으로 이사 온 듯하다. 나는 그 순간, 어린 시절 고향집 마당의 닭장 소리를 떠올렸다. 새벽을 깨우던 그 울음은 늘 하루의 시작을 알려 주었다. 세월은 흘렀지만 소리는 여전히 나를 과거로 데려간다. 시장의 소리는 단순히 현재의 풍경만이 아니라, 나의 기억까지 불러오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나무와 바람이 만든 오후의 음악

 

정오가 지나 산책로를 걸었다. 햇빛은 따갑고, 발걸음은 느려졌다. 그때 귀를 스치는 소리가 있었다. 나뭇잎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내는 소리였다. “사라락, 사라락.” 단순한 마찰음 같지만, 귀를 기울이면 바람이 나무와 대화하는 소리처럼 들린다.

길가 벤치에 앉아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니 오히려 소리가 더 선명해졌다. 멀리서 아이들의 웃음소리, 자전거 벨 소리, 강아지가 짖는 소리까지 겹겹이 들려왔다. 더 멀리서는 자동차가 지나가는 소음도 잔잔히 깔려 있었다. 각각은 제각각인 듯하지만, 모두 모여 하나의 음악이 된다. 세상은 늘 소리를 연주하고 있었는데, 내가 바쁘게 걷느라 듣지 못했을 뿐이다.

 

특히 나무가 내는 소리는 묘한 위로가 된다. 바람이 세게 불면 나무는 크게 몸을 흔들며 저항하지만, 동시에 노래처럼 소리를 낸다. 그 소리는 조금 거칠고 우렁차지만, 듣는 이에게는 묘하게 평화롭다. 사람도 그렇다. 힘든 상황이 닥칠 때 내는 한숨, 짧은 투정, 혹은 마음의 소리들은 때로 다른 이에게 위로가 된다. 나무의 노래가 내 마음을 가볍게 해 주듯, 사람의 목소리도 서로를 살게 한다.

 

잠시 눈을 감고 있으니 곤충 소리가 더해졌다. 풀숲에서 들려오는 매미의 합창, 풀벌레의 가느다란 소리. 계절의 소리가 귀에 스며들었다. 낮의 매미 울음은 여름의 더위를 더욱 실감나게 하지만, 동시에 계절이 살아 있음을 알려 준다.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계절의 무게를, 귀로는 이렇게 느낄 수 있다.

 

지하철이 전하는 저녁의 이야기

 

해가 저물 무렵, 지하철을 탔다. 출근길의 소음과 달리 저녁의 지하철은 조금 느긋하다. 그러나 여전히 소리는 풍성하다. 브레이크가 멈추는 소리, 철로 위를 구르는 쇳소리, 안내 방송이 섞여 지하철 특유의 리듬을 만든다.

가장 인상적인 건 브레이크가 멈추는 순간의 소리다. “끼이익―” 하는 날카로운 소리는 어떤 이에게는 불편할지 모르지만, 내게는 도시의 심장 박동처럼 들린다. 하루 종일 수많은 사람들이 이 소리에 의지해 움직였다. 직장인, 학생, 장바구니를 든 노인까지, 이 소리 위에서 하루가 흘러간 것이다.

 

좌석에 앉아 주변을 살폈다. 젊은 학생들이 웃으며 떠드는 소리, 휴대폰을 두드리는 소리,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작은 음악 소리. 옆 자리에서는 신문을 접는 바스락거림이 들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누군가 졸다가 창문에 머리를 부딪히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사소한 소리들이지만, 그것들이 모여 지하철만의 풍경을 만든다.

 

문이 닫히며 “삑삑” 경고음이 울린다. 그 소리에 맞춰 승객들은 자리에 앉거나 서둘러 내린다. 규칙적인 리듬 같기도 하고, 하나의 합주 같기도 하다. 도시의 저녁은 이렇게 소리로 완성된다.

 

오늘 나는 사진 대신 소리를 수집했다. 시장 상인의 외침, 나무와 바람의 대화, 지하철 브레이크의 울림. 그 소리들은 모두 내가 지나간 하루를 증명한다. 소리는 보이지 않지만, 마음에 남아 오래 울린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눈보다 귀가 더 많은 것을 기억하게 된다. 눈으로 본 풍경은 쉽게 잊히지만, 귀로 들은 소리는 오랫동안 머릿속에 울린다. 오래전 듣던 자장가, 잊을 수 없는 첫 인사, 누군가의 웃음소리는 세월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다. 소리는 곧 사람이고, 시간이며, 인생의 배경음악이다.

 

그래서 나는 내일도 길을 걸으며 소리를 기록할 것이다. 그 기록이야말로 나만의 여행기, 소리의 여행기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이 여행기를 다시 펼쳐 읽을 때, 나는 눈을 감고도 오늘의 시장, 오늘의 나무, 오늘의 지하철 속으로 다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는 여전히 살아 있는 하루의 울림을 들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