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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탐방기 – 돌담 위로 흐르는 시간의 걸음

by 휘주니 2026. 2. 19.

경복궁
경복궁

광화문을 지나, 시간을 통과하다

 

광화문 앞에 서면 늘 잠시 숨을 고르게 된다. 서울 한복판, 차들은 분주히 오가고 사람들의 하루는 바삐 흘러가는데, 이 문 하나를 경계로 시간이 다른 속도로 움직인다. 광화문을 지나 경복궁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발걸음은 자연스레 느려지고 시선은 위로 향한다. 조선의 숨결이 아직도 이곳에 남아 있다는 사실을, 몸이 먼저 알아차리는 듯하다.

 

경복궁은 ‘큰 복을 누리라’는 이름처럼 조선 왕조의 시작과 함께 세워진 가장 중심 되는 궁궐이다.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며 가장 먼저 자리를 잡은 곳, 그래서일까. 이 궁궐에는 다른 궁들보다도 ‘처음’이라는 기운이 깃들어 있다. 넓게 트인 마당과 반듯하게 정렬된 전각들은 마치 나라의 기강을 건축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근정문을 지나며 고개를 들면, 시야가 한 번 더 열리고 마음도 덩달아 넓어진다. 안내 방송이나 설명판이 없어도 괜찮다. 이곳에서는 말보다 공간이 먼저 설명을 한다. 돌 하나, 기둥 하나가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느냐”고 묻는 듯하다. 나는 그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안쪽으로 들어선다.

 

근정전 마당에서 권위와 침묵을 배우다

 

근정전 앞 마당에 서면 가장 먼저 느껴지는 것은 ‘침묵의 무게’다. 수백 년 동안 수많은 신하들이 줄을 맞춰 섰고, 수많은 결정들이 이 자리에서 내려졌을 것이다. 그 소란스러웠을 장면들은 사라지고, 지금은 바람 소리와 발걸음 소리만이 남아 있다. 그러나 그 침묵은 비어 있지 않다. 오히려 꽉 차 있다.

 

근정전은 경복궁의 중심이자 조선의 공식 무대였다. 왕의 즉위식, 외국 사신의 접견, 나라의 중대사가 모두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가까이 다가가 보면 화려한 단청과 섬세한 장식이 눈길을 끌지만, 조금 떨어져 바라보면 오히려 절제된 위엄이 먼저 느껴진다. 지나치게 꾸미지 않았기에 더 무겁고, 높이 올려 세웠기에 더 멀게 느껴진다.

 

나는 마당 한가운데서 잠시 서 있었다.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고 웃으며 지나가지만, 이 넓은 공간은 그 모든 소리를 흡수해 버린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권위란 소리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말을 아끼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근정전은 지금도 아무 말 없이 서서, 그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경회루에서 물 위에 비친 여유를 만나다

 

경복궁을 이야기하며 경회루를 빼놓을 수는 없다. 연못 위에 세워진 누각, 물과 하늘과 건물이 한 화면에 담기는 곳이다. 근정전이 ‘나라의 얼굴’이라면, 경회루는 ‘나라의 숨’ 같은 공간이다. 공식 행사와 연회가 열리던 장소이지만, 이상하게도 이곳에 서면 긴장보다는 여유가 먼저 찾아온다.

 

연못 가장자리에 서서 경회루를 바라보면, 물 위에 비친 기둥들이 실제보다 더 많아 보인다. 현실의 기둥과 그림자의 기둥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은, 마치 과거와 현재가 겹쳐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바람이 불면 그림자는 흔들리지만, 건물은 미동도 없다. 그 대비가 묘하게 마음을 편안하게 만든다.

 

잠시 벤치에 앉아 연못을 바라본다. 사람들은 사진을 찍고, 아이들은 연못 속 잉어를 찾느라 분주하다. 그러나 그 모든 움직임 속에서도 경회루는 중심을 잃지 않는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생각한다. 나도 이렇게 살 수 있다면 좋겠다고. 주변이 아무리 흔들려도, 내 자리를 지키며 물 위에 그림자 하나쯤 흔들리게 두는 삶. 경회루는 그런 삶의 태도를 조용히 보여주고 있었다.

경복궁을 한 바퀴 돌아 나오며 다시 광화문을 향해 걷는다. 들어올 때와는 조금 다른 걸음이다. 여전히 도시는 시끄럽고 하루는 바쁘겠지만, 마음 어딘가에는 넓은 마당 하나가 생긴 느낌이다. 필요할 때마다 그 마당으로 돌아와 숨을 고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경복궁 탐방은 충분한 의미를 가진다.

 

경복궁은 과거를 전시하는 공간이 아니라, 지금의 우리에게 태도를 묻는 장소다. 어떻게 서 있을 것인지, 어떻게 말할 것인지, 어떻게 흔들릴 것인지를. 그래서 나는 이 궁궐을 나서며 또 한 번 고개를 숙인다. 돌담 위로 흐르는 시간에게, 그리고 그 시간을 아직도 품고 있는 이 공간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