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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바다의 심장 소리 – 망각과 기억 사이 -휘주니- 파도 소리, 잊힌 시간의 속삭임 제주의 8월, 한라산의 품도 푸근하지만 역시 백미는 바다다. 햇살에 부서지는 푸른 물결은 보기만 해도 가슴이 뻥 뚫리는 시원함을 안겨준다. 그런데 자세히 귀 기울여 보렴. 파도 소리가 그저 철썩이는 물소리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거대한 숨을 내쉬었다 들이쉬는 듯한, 묵직하고 규칙적인 바다의 울림은 마치 대자연의 심장 소리처럼 들린다. 그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70년 살아온 내 심장 박동도 덩달아 고요하고 느리게 흘러가는 듯하다. 젊은 날의 나는 이 바다를 정복의 대상으로만 여겼다. 거친 파도에 맞서 싸우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 속에서 나의 한계를 시험하고 싶었다. 망망대해를 향한 알 수 없는 열정으로 가득 찼던 시기도 있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삶의 파도를 수없이.. 2025. 11. 22.
폭염 속 해묵은 동백나무 – 인내와 생명력에 대하여 뜨거운 8월, 묵묵히 뿌리 내린 삶의 증인 제주의 8월은 열기로 가득하다. 바다에서도, 오름에서도 이글거리는 태양의 기운을 온몸으로 받아낸다. 그런데 이 뜨거운 폭염 속에서도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존재가 있다. 바로 해묵은 동백나무들이다. 웬만한 나무들은 여름이면 푸른 잎으로 가득하지만, 겨울에 피어나는 꽃을 가진 동백나무는 이 여름에도 짙푸른 잎을 자랑하며 굳건히 서 있다. 그들의 끈질긴 생명력은 마치 제주의 역사를 통째로 품고 있는 듯하다.젊은 날에는 동백꽃의 화려함에만 눈이 팔려 동백나무의 묵묵한 존재감은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나 70년이라는 시간을 살아오면서, 이제는 꽃보다 나무의 강인함에 시선이 머무른다. 거친 바닷바람과 비, 그리고 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견뎌내고 이 8월의 폭염 속에서도.. 2025. 11. 14.
테니스 코트 위의 가족 전쟁 작년과 올해 나는 거침없이 다녔다. 작년엔 칠순기념 산행 10곳, 올해도 백록담 3번, 백운대와 대청봉 1번씩. 어디를 가도 7학년은 만나지 못했다. 그런데 거침없던 나에게 큰 거침이 생겼다. 아내다. 잘 달리던 내가 아내가 걸어오는 딴지에 꼼짝 못 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 주 토요일, 운명의 대결이 있다. 상대는 다름 아닌 아들과 며느리. 테니스 경기인데 내기의 크기는 100만원쯤 걸린 것이다. 아들아이가 여행 2박 3일 같이 갑시다며 내기를 건 것이다. 이름은 경주 APEC 뒤땅밟기. 여행 경비 전액이 걸린 ‘세대 간 혼합복식'을 치뤄야 하는데 아내가 말을 안 듣는다. 아들은 테니스 선수였다. 그런 아들과 맞붙으려면 며느리 쪽을 주로 공격해서, 아들아이가 무리한 커버 플레이를 하게끔 해야 실수가 나.. 2025. 11. 5.
휴애리 자연생활공원, 가을 산책의 핑크빛 초대장 제주 남원에 자리한 휴애리 자연생활공원은 이름부터가 범상치 않다. ‘휴(休)’는 쉼이요, ‘애리(愛里)’는 사랑의 마을이라니, 이보다 따뜻한 초대장이 있을까. 이름만 들어도 벌써 벤치에 앉아 쉬고 싶은 기분이 드는데, 9월의 휴애리는 그야말로 계절의 화원, 아니, 가을 풍경의 종합선물세트다. 코스모스가 바람에 설레고, 핑크뮬리가 분홍빛 연기를 피워 올리며, 방문객들의 마음은 어느새 동심으로 회귀한다. 이쯤 되면 ‘공원 산책은 무료로 받는 심리치료’라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코스모스, 가을의 손편지  휴애리를 찾는 9월의 첫인상은 단연 코스모스다. 길가와 정원마다 심어놓은 코스모스가 바람에 흔들릴 때면, 마치 누군가 오래된 편지지에 꾹꾹 눌러쓴 가을의 편지를 받아 드는 기분이 된다. 꽃잎은 얇지만 그 속에.. 2025. 11. 4.
가시리 녹산로 & 따라비 오름, 억새의 파도와 가을의 전망대 제주 동쪽 남원과 표선을 잇는 가시리 녹산로는 가을이 되면 ‘억새의 왕국’으로 변신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 도로 양옆으로 억새가 하얀 파도를 이루며 흔들리고, 그 길 끝에는 소박하면서도 매혹적인 따라비 오름이 우뚝 서 있다. 누군가는 이 길을 ‘억새 고속도로’라 부르고, 또 다른 이는 ‘가을의 대형 카펫’이라 한다. 어떤 이름을 붙이든 상관없다. 그저 가을 바람에 스치는 억새의 물결을 따라가다 보면, 마음까지도 하얗게 씻기는 듯하다. 녹산로, 억새의 바다 위를 달리다  9월 말이 되면 가시리 녹산로는 차창을 열고 달리기만 해도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느껴진다. 길 양옆의 억새가 바람에 일제히 고개를 흔들면, 마치 ‘어서 와, 가을 여행자!’ 하고 환영 인사를 건네는 듯하다. 햇살에 비친 억새의 은빛은 고급.. 2025. 10. 31.
중문 색달해변, 파도와 사람 그리고 한 접시의 바다 계절 따라 달라지는 색달해변의 표정  제주 중문 색달해변은 계절마다 다른 표정을 보여주는 해변이다. 여름 성수기에는 해수욕을 즐기려는 여행객들로 북적이며, 아이들이 튜브를 끌고 파도에 몸을 맡긴다. 9월 초까지는 여전히 바다에 몸을 담글 수 있어, 물놀이를 즐기는 이들의 웃음소리가 해변을 가득 채운다. 뜨거운 햇볕에 모래사장은 금빛으로 반짝이고, 파도는 장난기 어린 아이처럼 가볍게 사람들을 밀어낸다. 해변 입구에는 차양막과 파라솔이 늘어서고, 여름의 열기는 그곳에서 절정을 이룬다.  하지만 9월 중순이 넘어가면 분위기는 사뭇 달라진다. 이제는 수영복 대신 가벼운 바람막이를 걸치고, 모래 위를 천천히 거니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여름 내내 인파에 가려 보이지 않던 바다 본연의 푸른 색감이 드러나고, 파도 소.. 2025. 10.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