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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운현궁 탐방기

by 휘주니 2026. 1. 12.

조선의 궁궐
조선의 궁궐

돌담 안쪽에서 만난 조용한 권력의 숨결

 

운현궁은 경복궁이나 창덕궁처럼 위풍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종로 한복판, 분주한 도로와 커피 향이 넘치는 골목 사이에 슬쩍 몸을 낮추고 앉아 있다. “나 여기 있어요”라고 외치지 않고, “알 사람은 알겠지요” 하고 조용히 눈을 맞추는 곳이다. 대문을 들어서기 전부터 마음이 조금 느려진다. 나이 탓일까, 아니면 이곳이 가진 공기의 밀도 때문일까.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짧아지고, 숨이 고른다.


이곳은 흥선대원군의 사저이자 고종이 왕이 되기 전까지 살던 공간이다. 왕이 살던 궁궐이 아니라, 왕이 되기 전의 삶이 머물던 자리라는 점이 운현궁을 특별하게 만든다. 화려함보다는 준비의 시간, 권력보다는 기다림의 자세가 이곳의 바탕색이다. 그래서일까. 마당에 서 있으면 웅장함보다 생활의 흔적이 먼저 보인다. 권력이 태동하기 전의 숨 고르기, 그 조용한 긴장이 담장과 기둥 사이에 아직 남아 있는 듯하다.


관광객이 북적이는 시간임에도 운현궁은 소란스럽지 않다. 아이들의 발소리, 외국인의 낮은 탄성, 어르신들의 해설 소리가 서로를 방해하지 않는다. 마치 이곳에서는 소리도 예의를 배워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잠시 마루에 서서 햇볕을 받는다. 나무 바닥에 내려앉은 빛이 부드럽다. 오래된 나무는 빛을 반사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그 태도가 참 부럽다.

 

대원군의 마당에서 나의 시간을 세어보다


운현궁의 여러 공간 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오래 남는 곳은 넓지 않은 마당이다. 크지 않기에 오히려 사람의 시선이 허공으로 흩어지지 않는다. 마당 한가운데 서면 자연스레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대원군은 이 마당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조선을 개혁하겠다는 결심이 먼저였을까, 아니면 세상의 풍랑을 감당할 수 있을지에 대한 두려움이 먼저였을까.


나는 그 마당에서 내 시간을 세어본다. 이제는 무엇을 더 이루겠다는 욕심보다, 무엇을 덜어낼 것인가를 더 자주 생각하는 나이다. 젊을 때는 넓은 궁궐을 꿈꾸었지만, 지금은 이렇게 적당한 크기의 마당이 좋다. 관리할 수 있는 만큼의 공간, 마음이 닿는 만큼의 세계. 운현궁은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든다.


건물의 배치는 단정하다. 과하지 않고, 모자라지도 않다. 문을 열면 다음 공간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인생도 이랬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억지로 밀어붙이지 않아도 다음 장면이 열리는 삶. 문턱에서 한 번쯤 숨을 고르고 들어갈 수 있는 여유 말이다.
나는 마루 끝에 앉아 잠시 쉬었다. 나무 기둥에 손을 대니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다. 수백 년을 버텨온 나무는 온도를 초월한 듯하다. 그 손끝에서 이상하게도 위로를 받는다.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는 말 없는 조언 같다. 대원군의 시대도, 나의 시대도 결국은 다 지나가는 것임을 이 나무는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궁궐이 아니라 삶을 본다는 것


운현궁을 나서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흔히 역사를 ‘사건’으로 기억하지만, 이곳은 역사를 ‘생활’로 보여준다는 생각 말이다. 왕의 즉위, 개혁 정치, 쇄국과 개항 같은 거대한 단어들보다 먼저 떠오르는 것은 밥을 먹었을 방, 잠을 잤을 자리, 걸음을 옮겼을 마루다. 결국 역사는 사람이 살았던 흔적의 총합이라는 사실을 운현궁은 조용히 일러준다.


밖으로 나오자 다시 종로의 소음이 밀려온다. 신호등 소리, 차들의 경적, 사람들의 통화 소리. 하지만 아까 마루에서 느꼈던 고요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마음속에 작은 운현궁 하나가 남아 있는 느낌이다. 크지 않지만 단정하고, 필요 이상의 소리를 들이지 않는 공간.


나이가 들수록 여행의 기준이 달라진다. 많이 보는 것보다, 오래 남는 것이 중요해진다. 운현궁은 그런 면에서 참 좋은 장소다. 한 시간 남짓 머물렀을 뿐인데, 하루를 다녀온 것처럼 생각이 정리된다. 화려한 궁궐 사진 한 장보다, 마루에 앉아 쉬던 그 몇 분이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문득 이런 다짐을 해본다. 내 삶에도 불필요한 장식은 조금 덜어내고, 대신 쉬어갈 마루 하나쯤은 남겨두자고. 운현궁이 그러했듯, 나도 누군가에게는 조용히 들러 숨 고를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고. 역사 유적을 보고 왔을 뿐인데, 삶의 태도를 하나 배워온 기분이다.


다음에 또 어디를 갈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오늘의 운현궁은 분명 오래 기억될 것이다. 크지 않아서 더 깊었던 궁, 화려하지 않아서 더 단단했던 공간. 종로 한복판에서 만난, 참으로 나다운 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