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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고요수목원 탐방기 꽃보다 먼저 마음이 피어나는 곳입구에서부터 마음이 느려지다 아침고요수목원의 문을 들어서는 순간, 발걸음이 저절로 느려졌다. 일부러 천천히 걷자고 다짐한 것도 아닌데, 몸이 먼저 안다. 이곳에서는 서두를 일이 없다는 것을. 도심에서는 늘 신호를 기다리고, 시간을 재고, 목적지를 계산하며 걷지만, 수목원의 길은 목적보다 과정이 앞선다. 어디까지 가야 한다는 표지보다,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지가 더 중요해진다. 입구를 지나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화려한 꽃이 아니라 나무였다. 그 나무는 굳이 말을 걸지 않는다. 다만 “괜찮다, 서둘지 않아도 된다”는 표정으로 서 있을 뿐이다. 꽃이 사람을 부르고, 사진을 찍게 만드는 존재라면, 나무는 사람을 멈추게 만든다. 그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르게 된다. 숨이 고르게 되면.. 2026. 1. 5.
바람의 혀와 돌담의 귀, 제주 옛이야기의 숨결을 걷다 제주라 하면 흔히 떠올리는 이미지가 있다. 푸른 바다, 솟아오른 한라산, 그리고 우뚝 선 돌하르방. 그러나 이 익숙한 풍경 뒤편, 혹은 그 익숙함 속 깊숙이 숨어있는 제주의 진짜 심장 박동을 느끼고 싶다면, 관광객의 북적거림을 잠시 뒤로하고 투박하게 쌓아 올린 검은 돌담이 끝없이 이어지는 옛길로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제주의 진정한 이야기는 시끌벅적한 관광지 대신, 이곳 돌담 사이를 휘감아 도는 바람의 속삭임과, 그 바람의 모든 것을 묵묵히 들어준 돌담의 귀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돌담길은 마치 시간의 터널과 같아서,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수백 년 제주의 삶과 지혜가 바람처럼, 혹은 돌멩이처럼 단단하게 다가온다. 그 길 위에서 우리는 비로소, 관광객이 아닌 여행자가 된다. 바람의 혀, 제주의 .. 2025. 12. 23.
왕곡마을 탐방기 – 북방 한옥의 숨결을 따라 솔바람이 먼저 맞아준 마을 입구 가을 햇살이 살짝 누그러진 날, 아내와 나는 왕곡마을로 향했다. 속초 시내에서 그리 멀지 않지만, 길은 묘하게 과거로 이어지는 것 같았다. 네비게이션은 분명 “도착했습니다”라고 말했지만, 눈앞 풍경은 마치 조선 시대 어느 시골마을 같았다.돌담길 옆으론 억새가 흔들리고, 초가지붕 위엔 까치 한 마리가 느긋하게 앉아 있었다.“여보, 여기 공기부터 다르네요.”아내가 마스크를 벗으며 말했다. 나는 웃었다.“그러게, 이 공기 팔면 돈 될까?”왕곡마을은 북방식 한옥이 그대로 남은 몇 안 되는 전통마을이라 했다. 남쪽의 기와집과 달리, 이곳 집들은 나무판을 겹겹이 얹은 ‘너와집’이 많다. 비나 눈이 많은 강원도 날씨에 맞춘 지혜랄까. 나는 손으로 너와지붕을 살짝 만져보았다. 거칠지만 .. 2025. 12. 13.
서귀포 매일 올레시장, 남쪽 바다의 밥상이 펼쳐지는 곳 제주에 가면 바다는 눈으로만 보는 게 아니다. 귀로는 파도 소리를 듣고, 손으로는 바람을 만지고, 그리고 입으로는 그 바다를 맛본다. 그 모든 감각이 가장 생생하게 살아나는 곳이 있다. 바로 서귀포 매일 올레시장이다. 이름부터 구수하다. “매일”이라니, 이곳은 하루도 빼놓지 않고 사람들에게 먹거리와 풍경을 선물한다는 뜻이리라.시장 입구, 오감의 축제가 열리다 시장에 들어서자마자 코끝을 자극하는 건 기름 냄새다. 막 튀겨낸 고등어튀김이 고소한 연기를 내뿜고, 옆집에서는 한라봉을 짜낸 주스가 상큼한 향을 퍼뜨린다. 귀는 시끌벅적하다. 상인들의 목소리는 활기찬 응원가 같고, 관광객들의 웃음은 그 위에 화음을 얹는다. 발걸음이 멈출 수가 없다. “은갈치! 은갈치 싱싱해요!” “한치, 오늘 새벽에 잡은 거예요!”.. 2025. 12. 9.
주상절리대, 파도의 박수 소리 속을 걷다 제주 여행을 여러 번 다녀본 이라면 한 번쯤은 주상절리대를 향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주상절리대 봤다”는 말은 주변에서 자주 들리는데, 정작 기억 속 풍경은 흐릿하다. 아마도 검은 돌기둥들이 일렬로 서 있는 광경이 압도적이긴 한데, 사람이 그 옆에서 사진을 찍으면 배경이 너무 어둡게 나와서 SNS에 올리기 애매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결국 사진첩 속에서 잊히고, 여행의 주인공은 언제나 바다나 흑돼지 삼겹살로 넘어가버린다. 그러나 이번 가을, 나는 주상절리대를 달리 보기로 했다. 삼겹살보다 더 기름지고, 감귤보다 더 상큼한 시선으로. ‘바위 기둥도 사실은 패션쇼 런웨이에 선 모델처럼 포즈를 잡고 있는 건 아닐까?’라는 상상을 품고 말이다. 기둥의 정렬, 자연의 건축술 주상절리대에 서면 가장 먼저.. 2025. 12. 3.
푸른 바다의 심장 소리 – 망각과 기억 사이 -휘주니- 파도 소리, 잊힌 시간의 속삭임 제주의 8월, 한라산의 품도 푸근하지만 역시 백미는 바다다. 햇살에 부서지는 푸른 물결은 보기만 해도 가슴이 뻥 뚫리는 시원함을 안겨준다. 그런데 자세히 귀 기울여 보렴. 파도 소리가 그저 철썩이는 물소리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거대한 숨을 내쉬었다 들이쉬는 듯한, 묵직하고 규칙적인 바다의 울림은 마치 대자연의 심장 소리처럼 들린다. 그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70년 살아온 내 심장 박동도 덩달아 고요하고 느리게 흘러가는 듯하다. 젊은 날의 나는 이 바다를 정복의 대상으로만 여겼다. 거친 파도에 맞서 싸우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 속에서 나의 한계를 시험하고 싶었다. 망망대해를 향한 알 수 없는 열정으로 가득 찼던 시기도 있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삶의 파도를 수없이.. 2025. 11.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