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바다를 건너기 전부터 이미 반쯤 여행자가 되어 있었다. 성산항에서 배를 기다리며, 작은 선착장에 앉아 파도를 바라보는 순간부터 그랬다. 우도행 배편은 그리 크지 않다. 마치 시골 버스처럼 정겨운 모양새였다. 줄지어 기다리는 사람들 틈에는 자전거 헬멧을 쓴 젊은이들, 유모차를 민 가족들, 그리고 나처럼 단출한 복장의 여행자들이 뒤섞여 있었다.
배는 출렁이며 15분 남짓의 짧은 항해를 시작했다. 뱃머리에 서서 바람을 맞으며 우도를 향해 가는 그 시간은, 여행지로 이동하는 중이 아니라 '또 하나의 여행'처럼 느껴졌다. 바다를 바라보다 보면 생각이 참 단순해진다. “내가 왜 그렇게 바쁘게 살았지?”라는 질문이, 잔잔한 파도에 실려 머릿속을 맴돈다. 파도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대답이 필요 없는 순간이었다.
우도에 내리자마자 사람들은 저마다 목적지를 향해 흩어진다. 나는 고민했다. 도보? 자전거? 전기스쿠터? 걷는 것도 좋아하지만, 우도를 온전히 돌아보려면 바퀴가 필요하다는 것이 선배 여행자들의 조언이었다. 그래서 나는 자전거를 빌렸다. 전기자전거였다. 10년 만에 다시 타는 자전거였지만, 다행히 페달이 아닌 ‘스로틀’이 대신 달려 있어서 인생도 여행도 조금은 쉬웠다.
자전거를 몰고 우도 8경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처음 들른 곳은 서빈백사였다. 이곳의 모래는 일반적인 해변의 그것과 다르다. 하얗지 않다. 조개껍데기와 산호조각이 부서져 만들어진 이색적인 해변은, 우도에 와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려주는 배경이 되어준다. 바다 색도 그에 걸맞게 옥빛이었다. 나는 페달도 멈추고, 시선도 멈췄다. 누군가와 사진을 찍어주고, 그들도 내 사진을 찍어줬다. 이름도 모르는 타인의 카메라에 내 얼굴이 웃고 있었다.
이어 달린 곳은 검멀레 해변이었다. 이름처럼 해변이 검다. 바위 절벽 아래로 파도가 밀려오고, 그 너머로 작은 동굴이 보인다. 우도봉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이곳의 색감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진다. 나는 자전거를 잠시 맡기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 우도봉에도 올랐다. 한껏 들뜬 마음에 “이게 바로 우도봉~!” 하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옆에 있던 초등학생이 먼저 그 멘트를 날려버리는 바람에 입을 다물었다. 역시, 젊은 입담은 못 따라간다.
우도는 생각보다 작지만, 마을과 바다와 초원이 아기자기하게 이어져 있다. 그 조화가 참 예뻤다.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다 보면, 누군가의 고양이가 길 한가운데를 점령하고 있다. 길을 비켜줄 생각은 없어 보인다. 나는 속도를 늦추고, 고양이도 천천히 걷는다. 그 순간, 나도 고양이도 ‘이 섬의 주인’ 같았다.
한참 달리다 보니, 배가 고파졌다. 우도에는 참 특이한 먹거리가 많다. 그중 하나가 땅콩 아이스크림. 솔직히 처음엔 ‘땅콩을 아이스크림에 왜 넣어?’라는 의심부터 들었지만, 한 입 베어 물고선 바로 항복했다. 아이스크림의 고소함과 바삭한 땅콩의 조합은 꽤 중독성 있었다. 옆 테이블의 외국인 관광객도 “Oh, peanut!”을 연발하며 감탄사를 날리고 있었다. 세계인의 입맛도 사로잡은 걸 보니, 괜히 유명한 게 아니었다.
점심은 해물짜장으로 정했다. 해물은 오징어, 홍합, 새우까지 넉넉했고, 짜장은 그야말로 불맛이 진하게 느껴지는 맛이었다. 양도 많았다. 여행지에서 ‘많다’는 언제나 최고의 칭찬이다. 식사 후에는 땅콩막걸리까지 한 병 주문했다. 땅콩은 술이 되어도 고소했다. 하지만 자전거 운전이 남아 있었기에 반 병만 마시고, 나머지는 친구에게 기념품 삼아 포장해 갔다. (물론 친구는 "다 마시지 왜 남겼냐"라고 했지만.)
우도의 시간은 제주보다 더 느리게 흘렀다. 모든 것이 적당히 낡았고, 적당히 조용했으며, 적당히 아름다웠다. 대단한 볼거리가 있는 건 아니지만, 그 ‘적당함’이 좋았다. 마치 오래 알고 지낸 동네 친구처럼, 우도는 편안하고 무던했다.
돌아오는 배를 타기 전, 우도항 근처에서 마지막으로 바다를 바라봤다. 물결 위로 갈매기 몇 마리가 떠다니고 있었고, 해가 조금씩 기울고 있었다. 나는 그 풍경을 오래 눈에 담았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내 마음은 “다음엔 걸어서 한 바퀴 돌아볼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섬을 한 바퀴 도는 데 반나절, 마음이 채워지는 데는 그보다 더 짧은 시간이 걸렸다. 자전거 바퀴는 돌았고, 내 마음도 함께 굴러갔다. 여행이란 결국 그거다. 낯선 곳에서 새로운 바람을 맞고, 새로운 맛을 보고, 조금은 멍청해지는 시간. 우도는 그 멍청함을 너그럽게 허락해 주는 섬이었다.
나는 우도에 다녀온 뒤, 사람들에게 말했다. “거긴 자전거 타고 땅콩 아이스크림 먹으며 해물짜장으로 마무리하는 섬이야.”
사람들은 웃었다. 하지만 나만 아는 감동이 있다. 우도는 작지만, 추억은 늘 크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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