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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느릿한 파도, 표선해변에서 민속촌까지 -휘준-

by 휘준쭌 2025. 7. 14.

 

제주도는 항상 "핫플레이스"로 불린다. 하지만 정작 진짜 제주다움을 느끼려면, "핫"한 곳보다 "한적한" 곳을 찾는 편이 낫다. 예를 들어, 표선 같은 곳 말이다.


제주도의 동남쪽, 지도에서 보면 귤껍질의 아랫부분 즈음에 조용히 붙어 있는 마을, 표선. 처음엔 “표선이 어디야?”라는 반응이었지만, 한 번 다녀오고 나면 “표선이야말로!” 하며 두 눈에 별을 담게 된다.

 

표선의 상징은 뭐니 뭐니 해도 표선해비치 해변이다. 이름만 들어도 고급 리조트가 연상될 정도로 우아한 이름이다. 사실 이름에 ‘해비치(haevichi)’가 들어가는 건 순우리말 ‘햇빛’에서 온 거라고 한다. 햇빛처럼 맑고 따사로운 바다라니, 기대치부터 올라간다.

 

실제로 표선해변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수평선이 아니라 ‘수면선’이다. 이 바다는 유독 얕다. 성인 무릎 정도까지밖에 안 차는 수심이 백 미터 가까이 펼쳐져 있으니, 마치 누군가 일부러 얕게 만들어 놓은 것 같다. 덕분에 아이들과 함께 온 가족들, 그리고 수영 못 하는 어른들의 천국이다. 나도 그중 한 명이다.


물이 깊어질 걱정도, 파도에 휩쓸릴 걱정도 없다. 발끝만 담그고도 하루 종일 바다와 눈 맞춤을 할 수 있으니, 어쩌면 이건 제주 바다의 "온돌버전" 아닐까 싶다.

 

해변 모래는 부드럽고 희며, 조용한 파도는 무언가를 속삭이는 것 같다. 가끔은 “좀 누워보시죠”라고 유혹하는 것 같기도 하고. 결국 나는 돗자리를 깔고 누웠다. 모래는 뜨겁지 않았고, 바람은 살랑거렸다. 이런 날엔 괜히 책을 꺼내 읽는 척하다가, 몇 장 넘기지도 못하고 잠든다. 바다 앞에서의 낮잠은 숙면보다 낫다.

 

그렇게 느긋한 시간을 보내다 보면, 해변 근처에 조용히 서 있는 한 곳이 눈에 띈다. 바로 제주민속촌박물관이다. 이름만 들으면 왠지 초등학교 수학여행 코스 같지만, 막상 들어가 보면 생각보다 훨씬 흥미롭다. 민속촌은 조선 시대 제주를 통째로 복원해 놓은 마을이다. 그것도 매우 집요하고 정성스럽게.

 

처음 마주한 건 초가집. 지붕은 새끼줄로 꾹꾹 눌러 묶여 있고, 돌담은 제주 특유의 감성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예전엔 왜 그렇게 낮은 집만 지었나 했는데, 바람을 직접 맞아보니 이유가 확 와닿는다.

 

그리고 가장 인상 깊은 건 ‘돗통시’라는 전통 화장실이다. 놀라지 마시라. 이곳에서는 돼지와 사람이 공동으로 해결을 본다. 돗, 즉 돼지가 아래에서 기다리며... 나머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덧붙이자면, 이 시스템은 그 당시 유기농 순환의 정점이었다.)

이 민속촌은 드라마 ‘대장금’, ‘해를 품은 달’, ‘이산’ 등 여러 사극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덕분에 입장하면 은근히 ‘조현병’이 도진다. 나도 어느 순간 초가집 앞에 서서 괜히 “하면, 상소를 올리옵니다” 같은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누가 보면 민속촌의 광대인 줄 알았을 거다.

 

민속촌 한쪽엔 제주 전통 놀이 체험장도 있다. 널뛰기, 투호, 굴렁쇠 굴리기. 어릴 적 동네에서 해봤던 것들을 다시 만나니, 몸보다 마음이 먼저 반응한다. 아이들 틈에 끼어 굴렁쇠를 굴리는데, 내 마음이 굴러간다. 굴렁쇠가 아니라 향수였다. 한 바퀴, 두 바퀴 돌고 나니, 나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

 

무엇보다 민속촌이 좋은 건 걸어다니기 편하다는 것이다. 언덕도 없고, 길도 잘 정비돼 있다. 부모님을 모시고 오기에도, 유모차를 밀며 돌아다니기에도 더할 나위 없다. 어르신들은 “이런 게 진짜 제주지” 하며, 어린아이들은 “할머니네 집 같다”라고 말한다. 세대를 뛰어넘는 공감의 공간이라니, 드물고 반갑다.

 

민속촌을 나와 다시 해변으로 나가니, 바다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물빛은 조금 더 노을에 물들었고, 바람은 한결 따뜻해졌다. 저녁 무렵이 되면 표선은 더 고요해진다. 관광객들이 모두 숙소로 돌아간 그 시간, 표선의 바다는 나만의 파도소리를 들려준다.
“오늘 잘 놀았지?” 하고.

 

표선은 숙소도 조용하다. 화려하진 않지만, 정갈하고 조용하다. 저녁을 먹고 바닷가를 산책하는 동안에도 자동차 소리보다 개 짖는 소리가 더 잘 들린다. 밤하늘은 별이 쏟아지고, 마을 가로등은 노란빛으로 바다를 감싸 안는다. 이곳은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동네다.


제주가 그리워질 때, 떠오르는 건 협재의 햇살이나 성산의 일출이 아니라, 표선 바다 앞에서 졸고 있던 내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