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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얄개

스승의 날, 선생님을 깔아 뭉개고 환호하던 얄개들 -휘준-

by 휘준쭌 2025. 5. 14.

고교 시절, 우리들이 주로 다닌 소풍지는 서울 근교 왕릉이었다. 서오릉 동구릉 서삼릉...

소매에 백선 두른 교복을 입었었다.
소매에 백선 두른 교복을 입은 고1들, 사뭇 표정이 진지하다.

 

워커 신은 학생이 필자, 왼쪽이 키 제일 커서 1번이었던 철이.

 

워커 드러내며 드러눕기 직전의 필자 뒤로, 고장 난 야전(야외전축) 고치느라 골몰한 친구들

 

임금님 묘 옆에서 야전 틀어놓고 트위스트와 알리.... 참 열심히들 놀았지. 흑백 사진을 보니 50년 전 기억들이 하나둘씩 살아난다

그래, 그때 그 말타기. 국어선생님께서 말타기를 하는 우리를 보시더니
"이눔들아, 나를 타봐라 안 무너진다."

사진을 보니 이미 선생님 허리가 휘었는데, 철이가 올라타자 주저앉고 발목을 다치셨다

 

웃통 벗고 엎드리신 국어선생님 옆으로 우리는 모자와 윗도리를 벗어던지며 신났었지.
지금 보니 그때 선생님의 허리가 이미 휘어있었는데, 키 제일 큰 장다리 철이가 세 번째로 타자마자 말은 짜부.

선생님은 쓰러지며 발목을 다치셨고 열흘 넘게 절뚝거리셨다.


우리들은 약국에서 안티푸라민을 사서 엽서와 함께 드렸는데, 사연은 공부 꼴찌인 내가 썼다.

"선생님, 보세요. 세 번째로 탄 장다리가 범인이잖아요. 어쨌든 죄송해요. 저희들 공부도 잘할게요. 아으 다롱디리 날랜 낼스망정...!"

고문 배운 지 몇 달 안 된 고1 학생이 고문 후렴구를 썼다고 칭찬 많이 받았다.
그 칭찬을 선생님은 기억 못 하실 테지만, 들은 아이는 평생 잊지 못했다.

사진 속의 아이들 모두 명문대 법·상대에 진학했지만 이 사진에서 딱 두 인물은 대학에 가지 못했다.

말과 마부였던 '선생님과 나' 딱 둘.

 

그러나 나는 그 칭찬을 잊지 못하고 3류 대학을 다녔지만 국문학과를 택한 덕분에 늦도록 붓방아 찧으며 살고 있다.^^

나는 중3 때 이런 선생님도 만났다.


상상화 한 점씩 그려오기가 숙제였는데 선생님이 그림을 보시더니 어디서 베꼈냐고 물으셨다.
나는 베낀 것 아니라고, 선생님은 어디선가 본 그림이라고... 선생님은 갸우뚱 거리더니 느닷없이 어린것의 뺨에 따귀를 날리셨다.

" 이 쉐끼 수영부지? 누굴 속일라고."

 

따귀를 맞은 내 얼굴은 뒤편 모서리 두 면에 부딪혔으니 쓰리쿠션을 당한 셈이다. 운동선수가 그림을 너무 잘 그렸다는 뜻인가?
그것은 자기를 무시하면 죽인다는 린치였고,
그날로 나는 미술이라는 글자는 쳐다보기도 싫어졌다.

 

미술은 초등 5학년 때 돌아가신 엄마와의 연줄이 탄탄했던 과목이다.
4학년 때 서울 사생대회에 영등포구 대표로 참가했던 창경궁에 소풍처럼 따라오신 엄마가 고궁구경은 처음이라며 좋아하셨었다.

엄마는 지금 그리는 것은 무엇이냐며 자주 물으셨고, 그때마다 삶은 달걀을 입에 넣어주셨는데, 오이와 달걀이 입에 꽉 차서 싫증이 날 정도였다. 그렇지만 나는 웃으며 거절했다. 싫어도 웃는 방법은 참 일찍 배운 셈이다.

돌아오는 전차 안에서도 달걀을 까주셨다.


먹다가 흘려도 야단맞지 않았는데, 몸이 약하셨던 엄마는 그 해를 못 넘기고 돌아가셨다.
미술은 엄마에게 그런 위로를 줬던 과목이다. 그러나 중3 때 미술 선생은 그 싹을 잘라버린 것이다.

 

나는 운동으로 클 싹도 있었다. 대선배님 손기정 선수의 새까만 후배로서 전통의 교내 마라톤 우승자이다.
수영선수로서도 고교 1학년 올라가니 3학년에 아샤물개 조오련이 있었는데, 2, 3학년을 제치고 조오련을 포함한 국가대표 2명과 릴레이를 뛰어 우승했다. Y고 최초이자 마지막 수구 골키퍼도 형들을 제치고 내가 했다.

 

Y고 수영부는 이듬해 코치 구할 돈이 없어 와해됐고, 나는 공부해 보겠다고 발버둥을 쳤으나 공부가 마음먹는다고 다 잘한다면 세상은 우등생으로 넘쳐나지 않겠는가.

 

두 번도 아니고, 중고교 6년 동안 딱 한 번 들은 선생님의 칭찬 "이눔, 국어에 소질 있는데?" '국어에 소질' 이 소리를 생각하면 어디선가 안티푸라민 냄새가 나는 듯도 했다.

 

우리와 말타기를 해주신 국어 선생님 덕분에 나는 국문학도가 되었구 늘그막엔 재능기부 센터에서 '문예창작 교수'라는 호칭도 들어봤으니 더 원도 없다.

 

'선생님, 늦도록 붓방아 찧으며 사는 늙은 제자가 올리는 큰절 한 번 받으옵소서.'
그래도 인사말은 이렇게 밖에 못 썼습니다. 더 잘 붙이려고 밤새워도 찾지 못했습니다.
"선생님, 정말 정말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