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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얄개

(14) 오필이와 하재억과 유실영 어머니와 나의 엄마 -휘준-

by 휘준차 2025. 3. 25.

고교 졸업 후 처음으로 모인 반창회에서 오필이 군을 만났다.

50년 만의 만남인데 퍼뜩 떠오른 추억은 고1 때 운동회다. 반의 체육부장으로서 출전 선수 명단을 짜고 있던 내가 필이에게 너 단거리 빠르던데 100미터 좀 뛰어주라.” 했더니, 엄마한테 물어보고 답은 내일 주겠단다. “야 난 5천 미터도 물어보지 않고 뛰는데, 그거 잠깐 뛰는 걸 무슨 엄마한테 물어보냐?”

 

"야 너, 100미터 달리기 선수 좀 해 줘라."
"안돼, 엄마한테 물어보구."
"나는 5000미터도 물어보지 않고 뛰는데, 뭘 그런 것까지 엄마한테 허락받냐?"
"아냐, 난 물어봐야 돼!"

 

이게 고교 1학년들의 대화로 보일까?

선수 명단 제출 기한이 당일이어서 "쪼다새끼" 하며 빼버렸던 필이에게 그때 답변이 왜 그랬냐고 물었다.

할아버지가 된 필이의 답은 이랬다.

난 아직 자전거도 못 타. 자전거 배우면 오토바이 탄다고 엄마가 극구 말렸거든."

"그래서 100미터 달리기도 엄마한테 물어보고 뛰려 했다구?"

쪼다 새끼 라며 흉을 봤던 고1 때의 의문이 반백 년 만에 풀린 것이다.

 

필이는 얼마나 귀히 큰 아들이었을까. 단속한 엄마나 말씀에 순종한 아들 둘 다 대단한 모자지간 아닌가.

술을 한 잔 따르며 우리는 같이 웃었다. “몇 잔 마실까? 엄마한테 전화해 보고 마시자 하하하.”

쪼다 같던 필이는 일류 대학에 진학했고, 선수명단을 짜던 나는 삼수생이 됐다.

내가 대학 1학년이 됐을 때, 필이는 이듬해 졸업반이 된 거다.

 

같은 고1 때, 하재억 군의 집에 가보니 냉장고에 자물쇠가 채워 있었다.

문짝에 다는 일반 경첩을 달아 잠근 것이니 볼 상 사납기도 했다.

계모 슬하임을 고백한 재억인 친동생이 둘 있었고 배다른 막내가 한 명 있었는데,

냉장고 여닫는 것은 계모와 막내만 할 수 있었다. 이 무슨 해괴한 집안인가?

필이 어머니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지만 재억 형제는 모두 일류대에 진학했으니

교육비결 만은 달리 가지신 어머니가 아니었을까.

 

1 때 뵈온 유실영 군의 어머니, 교사 앞에서 노는 자기 아들을 사랑스럽게 쳐다보시던 눈매가 생각난다.

참으로 자애로운 표정이셨다.

우리 엄마도 살아계셨으면 헐렁한 교복에 좀 큰 모자를 썼던 실영이와 나를 저런 표정으로 보셨겠지?

 

내가 초등 5학년 때 어머니는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셨다.

그 어머니만 살아계셨어도 더 좋은 학교로 진학했거나 운동부로 끌려가 공부까지 망하진 않았을 거다.

실영이와 나는 특활 수영반에 들었었는데, 그는 어머니의 사랑으로 빠져나갔지만 나는 그런 엄마가 없었다.

 

참고로, 우리 손주들을 운동선수로 키우게 될 때 꼭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신체조건에 맞는 운동을 택했는가를 살펴야 한다.

나는 중1 때부터 수영 계주를 뛴 에이스였지만 손발이 작아 수영엔 안 맞는 선수였다.

그런데도 학교에선 놔주지 않았고, 악바리로 물을 움켜낸 것이 자기 무덤을 판 것인 줄은 고교생이 되어 알았다.

 

수영 선수에겐 물갈퀴였던 손발이 작다는 것은, 학년이 올라갈수록 키가 안 크는 농구선수와 같다.

그들은 농구부 퇴출을 허락받게 되지만, 공부는 더욱 따라갈 수 없는 처지가 되어 크나큰 고민에 좌절한다.

 

성공한 국가대표선수들은 모두의 부러움을 사지만, 대표로 크지 못한 선수들은 단축수업과 합숙 훈련 등으로

공부까지 망친 뒤이니 죽도 밥도 아닌 세월을 보낸 것이다. 이는 우리 청소년 시대의 크나큰 병폐이기도 했다.

 

https://youtu.be/IuZwhdyGo1Y?si=j5AKANxzn6qKIIP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