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여행의 매력은 계절마다 다르게 다가온다. 봄에는 유채꽃이 들판을 덮고, 여름에는 푸른 바다와 파도가 청량함을 선사한다. 가을로 접어드는 9월, 제주는 바람이 한결 선선해지고 하늘빛이 유난히 맑아진다. 이 시기에 꼭 추천하고 싶은 여행지가 있으니, 바로 조천읍 교래리에 위치한 에코랜드 테마파크다. ‘테마파크’라는 이름이 붙어 있어서 잠시 놀이기구가 즐비한 곳을 상상했지만, 실제로 마주한 풍경은 전혀 달랐다. 이곳은 곶자왈 숲을 누비는 기차 여행을 중심으로, 자연과 하나 되는 체험이 펼쳐지는 공간이었다.
기차를 타고 떠나는 숲 속 여행
에코랜드의 상징은 단연 붉은색 기차다. 19세기 증기 기관차를 모델로 한 영국식 기차가 천천히 레일 위를 달린다. 승강장에서 기차가 들어올 때면,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까지 함박웃음을 짓는다. 탑승 후 ‘칙칙폭폭’ 소리와 함께 출발하는 순간, 마음속의 나이도 함께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듯하다.
에코랜드 기차는 총 다섯 개의 주요 정거장을 돈다. 각각의 정거장마다 풍경과 테마가 달라서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여행의 장면을 차례차례 넘겨 보는 듯한 즐거움이 있다. 첫 번째 정거장은 메인스테이션. 이곳에서 출발한 기차는 곧장 곶자왈 숲으로 들어선다. 기차 창밖으로 펼쳐지는 숲은,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풍경이다.
곶자왈은 화산 활동으로 생겨난 바위와 흙 위에 숲이 자라난 독특한 지형이다. 덕분에 열대식물과 온대식물이 한데 어우러져, 마치 작은 지구를 축소해 놓은 듯한 생태계를 보여준다. 기차 창문을 열면 선선한 바람과 함께 푸릇한 숲 냄새가 들어온다. 바위 사이에서 자라는 이끼, 울창한 동백나무와 구실잣밤나무, 그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이 모두 그림처럼 어우러진다.
정거장에서 만나는 작은 모험
두 번째 정거장은 에코브리지 스테이션. 이곳에서는 나무 위로 놓인 긴 다리를 걸으며 숲을 다른 시선에서 바라볼 수 있다. 흔들다리를 건널 때마다 아이들은 까르르 웃고, 어른들은 은근히 긴장한 표정을 짓는다. 다리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숲은 마치 초록빛 파도 같아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세 번째 정거장은 레이크사이드 스테이션이다. 잔잔한 호수를 중심으로 산책로가 이어지고, 호수 위에 떠 있는 오리배와 작은 카페가 여행자를 반긴다. 호수에 비친 구름과 나무들이 한 폭의 풍경화를 만든다. 가만히 벤치에 앉아 있으면 시간의 흐름마저 느려지는 듯하다.
네 번째 정거장은 피크닉가든 스테이션. 이름 그대로 잔디밭이 펼쳐진 공간으로, 도시락이나 간단한 간식을 즐기기에 제격이다. 가을 햇살 아래 가족들이 돗자리를 펴고 앉아 웃음을 나누는 풍경이 참 평화롭다. 아이들은 잔디밭을 뛰어다니며 에너지를 발산하고, 부모들은 잠시 여유를 찾는다.
마지막 정거장은 키즈타운 스테이션이다. 어린이들을 위한 놀이터와 체험 시설이 있어 가족 단위 여행객들이 오래 머무는 곳이다. 작은 미끄럼틀, 나무로 만든 체험 공간, 그리고 동화 속에 들어온 듯한 장식들이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사진으로 남기는 추억, 마음에 남는 풍경
에코랜드는 곳곳이 ‘포토존’이다. 나무 사이로 놓인 원목 벤치, 다리를 건너며 내려다보는 숲, 호수 위의 오리배, 붉은 기차의 곡선까지 모두 사진으로 남기고 싶은 순간들이다. 특히 가을 햇살이 기울 무렵, 기차가 호수 옆을 지날 때 풍경은 황금빛으로 물든다. 그 순간을 담아낸 사진은 두고두고 꺼내 보며 여행의 감성을 다시 불러올 수 있다.
9월의 에코랜드는 더욱 특별하다. 여름의 무더위가 가시고, 단풍이 물들기 전의 숲은 푸른빛을 한껏 간직하고 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니, 걷기에도 좋고 앉아 있기에도 좋다. 여기에 기차가 천천히 숲을 가르며 달리는 소리까지 더해지면, 그야말로 몸과 마음이 모두 쉬어가는 시간을 누릴 수 있다.
자연과의 대화, 그리고 돌아보는 일상
에코랜드의 숲 속을 달리며 느낀 건, 단순히 ‘기차를 타고 놀았다’는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기차의 속도는 결코 빠르지 않았다. 오히려 일부러 천천히, 숲의 숨소리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천천히 움직였다. 그 덕분에 우리는 바람의 방향이 바뀌는 순간을 감지할 수 있었고, 잎사귀가 서로 부딪히며 내는 소리를 귀 기울여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분명히 자연이 우리에게 건네는 인사였다.
특히 곶자왈의 공기는 다른 숲과는 조금 달랐다. 한라산 기슭에서 흘러내린 바람과 화산섬 특유의 습한 공기가 뒤섞여, 묘한 청량함을 만들고 있었다. 그 속에서 깊게 들이마신 한숨은 몸속 깊은 곳의 묵은 먼지까지 씻어내는 듯했다. 숲은 말없이 나에게 “괜찮다, 조금 쉬어도 된다”라고 말해 주는 듯했다.
호수 옆에 서 있을 때는 또 다른 대화가 오갔다. 바람이 멈추면 물 위에 하늘이 고스란히 비쳤다. 구름 한 조각이 흘러가는 것도,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것도 모두 호수에 옮겨졌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치 내가 거울 앞에 선 듯, 마음이 그대로 비춰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지?’, ‘내 마음은 지금 어디쯤 와 있지?’ 하는 자문이 절로 따라왔다. 여행이란 결국 새로운 풍경을 보는 동시에, 자기 자신을 다시 들여다보는 일이 아닐까.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문득 일상의 풍경이 겹쳐졌다. 매일 반복되는 출근길, 휴대폰 속에 쏟아지는 뉴스와 메시지들, 해야 할 일과 끝내지 못한 일들이 겹겹이 쌓여 있는 나의 책상.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순간, 그런 것들이 무겁게 다가오지 않았다. 숲을 지나며 얻은 여유가 나를 감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복되는 일상조차도 잠시 멈춰 서서 바라보면, 기차의 느린 리듬처럼 차분히 흘러갈 수 있음을 깨달았다.
에코랜드에서의 하루는 결국 ‘자연과의 대화’라는 이름의 쉼표였다. 그리고 그 쉼표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 마침표가 아닌, 새로운 문장을 열어주는 느낌을 주었다. 마치 숲이 “지쳤을 때는 언제든 나를 찾아와”라고 약속하는 듯했다.
제주의 9월은 바다가 여전히 푸르지만, 숲은 서서히 계절의 옷을 갈아입는다. 뜨거운 햇살을 견디느라 지쳐 있던 나무들이 이제는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한숨 돌리는 시기다. 그 변화의 순간을 가장 가까이서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에코랜드다. 이곳에서는 단순히 경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호흡에 발맞추어 걷고 앉고 달리는 경험을 한다.
특히 가족 단위 여행객들에게 에코랜드는 좋은 선택이 된다. 아이들은 기차를 타는 순간부터 눈이 반짝이고, 어른들은 숲의 풍경 속에서 잠시 마음을 내려놓는다. 함께 찍은 사진은 시간이 흘러도 웃음을 불러올 것이고, 그때의 바람은 오래도록 기억 속에 머무를 것이다. 혼자 여행하는 이들에게도 이곳은 훌륭한 쉼터가 된다. 기차 창밖으로 스치는 숲은 혼자의 고요함을 채워주고, 호수의 물결은 묵묵히 위로를 전한다.
혹시 제주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하루쯤은 바다와 오름 대신 곶자왈 숲으로 발길을 돌려 보자. 붉은 기차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기차는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라, 일상에서 놓쳤던 여유와 행복을 태우고 달리는 특별한 동반자가 되어 줄 것이다. 여행이 끝나도, 마음속에 그 기차는 여전히 달리고 있을지 모른다.
9월의 에코랜드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얼마나 자주 쉬고 있나요?” 그 물음 앞에서 잠시 멈추어 서는 순간, 여행은 이미 성공한 것이다. 숲이 건네는 대화와 기차의 리듬이 당신의 일상 속에도 잔잔한 울림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