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여행은 언제나 자연과의 만남으로 가득하다.
푸른 바다의 수평선, 바람 따라 흔들리는 억새밭, 돌담 위로 노니는 새 그림자, 그리고 정갈하게 뻗은 한라산 능선까지. 그 모든 풍경은 마음을 정화해주지만, 여행 중에는 문득 자연을 잠시 벗어나 전혀 다른 세계를 경험하고 싶을 때가 찾아온다. 마치 매일 먹던 된장찌개 대신, 하루쯤은 짜장면을 시켜 먹고 싶은 심정과 비슷하다. 이번 여행에서 나와 아내가 선택한 ‘짜장면 같은 하루’의 목적지는 바로 중문관광단지에 있는 ‘박물관은 살아있다(Alive Museum)’였다. 이름부터 ‘이 박물관이 정말 살아 움직인단 말인가?’ 하는 의문을 품게 만든다.
처음 만난 ‘움직이는’ 박물관
중문관광단지 초입으로 들어서면 리조트와 호텔이 길게 늘어서 있어 관광지 분위기가 물씬 난다. 하지만 그 사이사이로 눈길을 끄는 간판과 조형물이 등장한다. 특히 유난히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공간이 있었으니, 그곳이 바로 ‘박물관은 살아있다’였다.
멀리서부터 시선을 강탈한 것은 거대한 얼굴 모양의 조형물이었다. 입을 크게 벌린 얼굴 틈으로 사람들이 드나들며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얼핏 보면 얼굴이 우리를 삼키는 듯한 장면 같았다. 또 다른 한쪽에는 거꾸로 매달린 사람 모형이 달려 있었는데, 무심코 보면 진짜 사람이 발버둥 치는 듯 보여 순간 움찔하기도 했다. 벽을 뚫고 나온 듯한 거대한 손 조형물은 아이들에게는 놀이기구 같았고, 어른들에게는 ‘이거 어떻게 만든 거지?’ 하는 호기심을 자극했다.
입구 앞은 이미 작은 무대 같았다. 관광객들은 순번을 기다리며 포즈를 취했고, 삼삼오오 모여 웃음을 터뜨렸다. 보통의 박물관이라면 ‘조용히 관람해 주세요’라는 팻말이 붙어 있기 마련인데, 이곳은 정반대였다. ‘마음껏 즐기고, 과장되게 찍고, 웃음을 남겨라’라는 메시지가 오히려 더 어울렸다. 그제야 이름의 의미가 실감났다. 박물관은 단순히 전시된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지금 살아 움직이는 놀이 공간이었던 것이다.
문을 열고 들어선 착시의 세계
표를 끊고 문을 들어서는 순간, 눈앞은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로 바뀌었다. 마치 현실이 기울고, 벽이 움직이며, 내가 한순간에 만화 속 캐릭터가 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거대한 입체 그림이었다. 평면 캔버스에 그려진 그림일 뿐인데, 카메라 화면 속에서는 내가 절벽 끝에 매달려 있거나, 용의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장면처럼 연출되었다.
벽면 곳곳에는 ‘이 자리에 서 보세요’, ‘카메라는 이 방향으로!’라는 안내 문구가 붙어 있었다. 처음에는 다소 어색했지만, 막상 지시에 따라 포즈를 취하니 내가 그림 속 주인공이 되었다. 아내는 마치 영화 속 공주처럼 거대한 곰의 발톱에 매달려 있었고, 나는 그녀를 구하려는 영웅이 되었다. 사진 속 결과물을 확인하자, 현실에서는 평범한 포즈였던 동작이 완전히 다른 장면으로 변신해 있었다. 순간, 두 사람 모두 아이처럼 박장대소를 하고 말았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공간 자체를 왜곡시킨 트릭아트와 미디어아트의 콜라보였다. 한쪽 방은 바닥이 기울어진 듯 설계되어 있어 그대로 서 있으면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또 다른 공간에서는 벽 전체가 영상으로 덮여 있었는데, 눈앞에서 파도가 몰려오고, 불꽃이 튀고, 마치 우리가 영상 속으로 들어간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현실과 가상이 절묘하게 겹쳐지는 순간, 관람객은 더 이상 ‘방문자’가 아니라,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입구부터 시작된 웃음은 멈출 새가 없었다. 제주 바다에서의 장엄한 감동과는 또 다른 종류의 즐거움이었다. 자연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지만, 이곳은 오히려 억눌린 상상력을 끌어올리고, 몸으로 표현하게 만들었다. 마치 일상의 규칙과 중력을 잠시 잊고, 그림 속 세계에서 자유롭게 뛰노는 기분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은 포토존
이곳에서 가장 오래 머문 공간은 바로 ‘거꾸로 된 방’이었다. 테이블, 의자, 책장, 심지어 벽에 걸린 시계까지 모두 천장에 붙어 있었다. 관람객이 바닥에 앉아 있는 모습이 사진 속에서는 마치 천장에 매달린 사람처럼 보였다. 아내가 의자에 앉자, 사진 속에서는 그녀가 거꾸로 커피를 마시는 것처럼 연출되었다. 나는 그 앞에서 허겁지겁 커피를 받으려는 포즈를 취했는데, 완성된 사진은 마치 슬랩스틱 코미디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또 다른 방에서는 거대한 공룡의 입 속에 들어가 있는 장면을 찍을 수 있었다. 아이들이 그 안에서 울먹이는 표정을 지으며 사진을 찍었는데, 부모들은 그 모습을 보고 배꼽을 잡았다. 우리는 과장된 비명 표정을 지으며 사진을 남겼는데, 나중에 다시 보니 실제로는 그냥 활짝 웃고 있는 얼굴이라 ‘비명 실패작’이 되고 말았다.
가장 신기했던 것은 미디어아트로 꾸며진 거울의 방이었다. 사방이 거울로 둘러싸여 있어 끝없이 이어진 복도처럼 보였는데, 가운데 서 있으면 내가 수십 명으로 분열되는 착각이 들었다. 아내는 “당신이 이렇게 많으면 밥상머리에서 시끄럽겠다”고 농담을 했고, 나는 “그래도 설거지는 나 말고 다른 내가 하겠지”라며 응수했다. 그 순간, 거울 속 수십 명의 내가 동시에 웃는 모습은 꽤 괴상하면서도 웃음을 자아냈다.
아이처럼 웃은 하루의 의미
시간은 금세 흘러 어느새 두 시간이 지나 있었다. 보통의 박물관이라면 한두 전시품을 보고 나면 다소 지루해지기 마련인데, 이곳은 오히려 시간이 모자랐다. 아내와 나는 “마지막으로 이 포토존 하나만 더!”를 외치며 계속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어느새 휴대폰 앨범에는 200장이 넘는 사진이 가득 차 있었다.
돌아 나오는 길, 입구에서 다시 한 번 거대한 얼굴 조형물을 마주하자 괜히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그곳을 지나며 문득 깨달았다. 오늘 하루는 우리가 ‘관람객’이 아니라, ‘참여자’이자 ‘배우’였구나. 사진 속 포즈 하나하나에는 장난기와 웃음이 가득했고, 그것은 단순한 기념사진을 넘어 우리 둘의 또 다른 추억의 장면으로 남았다.
제주 여행은 늘 자연의 품에서 위안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잠시 자연을 떠나 상상의 세계로 뛰어들어 본 것이 색다른 재미가 되었다. 나이를 잊고 아이처럼 웃었던 시간, 그 웃음은 단순한 장난이 아니라 마음 깊숙이 쌓였던 피로를 풀어내는 해방구 같았다.
여행은 결국 ‘일상에서 벗어나는 경험’이다. 바다도, 산도, 숲도 그렇지만, 그림 속으로 들어가 웃음을 터뜨린 이 하루 역시 내겐 소중한 여행의 한 장면이다. ‘박물관은 살아있다’에서의 하루는 단순한 관광이 아니라, 현실을 벗어나 새로운 나를 만나게 해 준 특별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