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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얄개

(13) 나무젓가락과 뺑코 -휘준-

by 휘준차 2025. 3. 24.

 

짜장면 앞에서 나무젓가락을 비비는 내 친구 뺑코

 

    짜장면과 나무젓가락 그리고 뺑코

 

    백과사전에서 짜장면을 검색해 보니, 짜장면(-醬麵) 또는 자장면(-醬麵)은 양파, 양배추 등 채소와 돼지고기에 기름으로 

튀긴 춘장을 넣어, 굵은 국수에 비벼서 먹는 '한국식 중국 요리'라고 나와있다. 짜장면은 짬뽕, 우동과 함께 대표적인 한국식 중국 요리로 꼽힌다.

 

    짜장면은 중국의 자장몐이 한국식으로 변형된 것이다. 산동 요리를 기반으로 하는 대부분 한국식 중국 요리처럼 그 대표 격인 짜장면은 인천이 시작점이라고 나온다. 짜장면은 중국의 산둥반도 지역의 가정식이었던 자장몐(炸醬麵)이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변하여 만들어진 음식이라고 한다.

 

    1890년대 중국 산둥(山東) 지방에서 건너온 부두 근로자들이 인천항 부둣가에서 간단히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춘장에 국수를 비벼 먹던 음식이 짜장면의 시작이었다고 한다.

 

    한국 전쟁 직후인 1950년대 중반, 영화장유의 사장 왕송산은 춘장에 캐러멜을 넣어 단맛이 나도록 하고 사자표 춘장이라는 상품명으로 출시하였다. 이로써 한국의 짜장면은 여러모로 중국의 자장몐과는 다른 음식이 되었다.

 

1960년대에 짜장면의 원가를 낮추기 위해 감자와 양파를 넣게 되었다. 1960년대~1970년대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펼친 분식장려운동과 조리 시간이 비교적 짧은 점이 산업화 시대와 맞아떨어지면서 짜장면은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한국에서 외식산업이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전인 1980년대 이전에는 서민들이 외식할 때 가장 손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각광받았으며,, 특히 입학·졸업·생일을 축하할 때, 이사 가는 날 등에 가족들이 같이 즐겨 먹었다.

 

문교부(현. 교육부)가년 고시한 외래어 표기법과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자장면'만이 표준어이고 맞춤법에 맞는 표기로 실려 있었다. 국립국어원 박용찬의 설명에 따르면, 자장면은 짬뽕과는 달리, 중국 된장을 가리키는 '자장'과 한자어인 ''()이 결합한 형태로 보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편, 시인 안도현은 그의 작품 《짜장면》의 제목과 관련해 "짜장면을 먹자고 해야지, 자장면을 먹자고 하면 영 입맛이 당기지 않을 게 뻔하다."라고 썼다. 그 밖에도 "짜장면은 자장면으로 쓰면서 짬뽕은 왜 잠봉이 아닌지
의문이 들게 만든다" 라면서 현행 외래어 표기법을 비판하는 견해도 있었다.

 

실제로 한국인 8명 중 1명은 매일 이를 먹고 있다는 통계도 있으며, 중식집에서 하루에 평균 600만 그릇이 소비될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받고 있는 짜장면은 이제 한국인의 음식에서 빼놓을 수 없게 되었다.  그 짜장면이 우리나라에 활발히 퍼진 지 105년쯤 된단다. 표준말이 ‘자장면’ 이래서 못마땅했지만 2002년에 발행된 표준 발음 실태 조사(최혜원, 국립국어원)에 따르면 서울·경기 지방 사람 210명 중, 151명이 '자장면'이 아닌 '짜장면'으로 발음하는 것으로 조사되면서 이후에 ‘짜장면’도 표준어로 등록이 되었다. 

 

    필자가 중학교 졸업 무렵에 친구들과 짜장면을 먹던 기억 하나를 소개한다. 그 이전에도 중국집에 갔었겠지만 그때가 첫 기억처럼 남아있는 것은 강렬한 추억 한 컷 때문이다. 흑백 사진처럼 바랜 추억 가운데 강렬히 남아있는 장면은 나무젓가락 비비기다.

 

    그 시절 젓가락의 품질이 좋지 않아서 제품 모서리에 나무 보푸라기가 몇씩 있었고 그냥 먹다간 입술이 찔리기도 했었다. 그런데 뺑코는 나무젓가락을 둘로 떼더니 손바닥 사이에 모으고 그것들끼리 마구 비볐다. 우리가 하나씩 뜯고 있는 보푸라기를 한꺼번에 처리한 것이다. 그리고 그 친구는 익숙하게 면을 비비고 벌써 먹고 있었다.

 

    우리가 특식처럼 어쩌다 먹는 짜장면을 그 친구는 많이 먹어본 것처럼 여겨졌고 집도 부유할 것이란 생각이 따라 들었다. 뽀얀 얼굴에 오뚝한 콧날이 그날따라 더 인상적이었고, 그 모습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지금도 산이나 들에서 컵라면을 먹을 때면 아니 어디서건 나무젓가락을 볼 때면 귀티 나던 그 얼굴이 떠오른다. 그렇게 살아나는 기억에 나 스스로 놀라곤 한다. 별로 대수롭지 않은 한 장면이 이렇게 오래도록 뇌리에 있을 줄이야.

 

    사실 그때 나무 보푸라기를 없애는 방법으로 젓가락 비비기는 기발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 방법을 몰라도 국수를 조금 늦게 먹을 뿐 어떤 것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에 하찮은 재주에 불과했다. 기발 하다기보다는 처음 보는 것이어서 인상적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랬는데도 뺑코는 나보다 뭐든지 잘할 것 같았고 나는 기가 죽어있었다.

 

    첫인상이란 그만큼 중요하다. 하지만 그 나무젓가락 비비기를 못생긴 친구가 했어도 이토록 남아있을까. 귀티 나는 뽀얀 얼굴로 젓가락을 비비는 뺑코의 하얀 손을 보고 아마 거무튀튀한 내 손을 보았을 것이다. 이 땅에 테트론 교복이 생겨났을 때도 옥양목(?)의 검정 교복은 1년이면 허옇게 빛이 바래었었다..

 

    같은 검은 교복 속에도 옷감에 따라 엄연히 존재했던 빈부의 격차, 이젠 잊어도 좋은 흑백 사진 몇 장 중 하나, 그것에 나무젓가락 하나 언제나 기대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