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12 아버지와 김 -휘준- 아버지! 오늘은 30년쯤 거스른 이야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중3이 되던 봄, 국가대표 선수들만 갈 수 있는 태릉선수촌에 입촌하게 되었을 때 아버진 관심 없는 듯 덤덤해하셨지만 저는 세 가지 감동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어마어마한 시설이었고, 둘째는 TV로만 보던 스타선수들과 같이 생활하게 된 뿌듯함이며, 셋째는 당시로선 획기적인 자유배식제도였습니다. 셋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자유배식이었습니다. 이상하게만 보였던 후라이드 치킨과 양식요리들, 밥이 아닌 것으로만 배를 채워도 되는 세상을 처음 보았습니다. 무엇이던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자유와 몸무게가 늘면 호된 기합을 받던 억압이 공존했던 사회. 선수촌 생활은 천국 같은 기억과 지옥 같은 훈련이 뒤섞인 추억입니다. 운동선수에.. 2025. 3. 29. 무심한 저 해조음이 들리십니까? -휘준- 영종도에서 지금 저는 끝이 안 보이는 활주로 앞에 서있습니다. 이 넓디넓은 대지를 여럿 거느린 공항은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러나 공항은 이 섬의 한 귀퉁이일 뿐입니다. 섬을 둘러싼 해변은 또 얼마나 클까요. 드넓은 해변이 어찌나 망망한지 물이 썰리면 해안선은 아득히 물러납니다. 광활하게 드러난 뻘엔 물 자국마다 햇빛이 담겨 반짝반짝 거립니다. 저 햇빛을 밟아보고 싶은 충동은 출근 때마다 이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한 번도 그리하진 못했습니다. 출근을 조금 빨리 하거나 퇴근을 좀 늦추면 되는데, 그것이 그렇게 어렵습니다. 무엇 때문에 쫓기듯 살아야 하는지요. 매일 오가면서도 해안도로에 잠시 내려섰다 간 적도 없으니 말입니다. 다시 바다를 봅니다. 아주 멀리 반짝임 사이에 개미처럼 꼬물거리는 것이 있습니다. .. 2025. 3. 28. 당신, 30초만 돌아보셔 -휘준- © mayurgala, 출처 Unsplash '당신, 딱 걸렸어!' 나이가 들면서 넓어지는 아내의 상식 중엔 이런저런 모임의 아줌마들 수다에서 얻는 것이 많으리라.그리고 그런 경우를 자기에게 대비시켜 보는 것은 인지상정일 것이다.출근하려는 내게 아내는 눈썹을 추키며 물었다. "당신, 공일공 삼삼사오가 누구야?" "뭔 소리야?" "통화 가능한가요?라고 찍혀있던데?" 밤새 내 핸드폰을 뒤진 모양이다. 비가 오는 저녁, 국화차 향기가 좋네요.이거는 또 누꼬? 친구들한테 배운 대로 척척 들어맞네.반말투로 보아, 단서를 잡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나는 가끔 컴퓨.. 2025. 3. 27. 수필 -피천득- 수필은 청자연적이다. 수필은 난이요, 학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 속으로 난 평탄하고 고요한 길이다.수필은 가로수에 늘어진 페이브먼트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길은 깨끗하고 사람이 적게 다니는 주택가에 있다. 수필은 청춘의 글이 아니요, 서른여섯 살 중년 고개를 넘어선 사람의 글이며, 정열이나 심오한 지성을 내포한 문학이 아니요, 그저 수필가가 쓴 단순한 글이다. 수필은 흥미는 주지마는 읽는 사람을 흥분시키지는 아니한다.수필은 마음의 산책이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취와 여운이 숨어 있는 것이다. 수필의 색깔은 황홀 찬란하거나 진하지 아니하며,검거나 희지 않고 퇴락하여 추하지 않고, 언제나 온화 우미하다. 수필의 빛은 비둘기 빛이거나 진주 빛이다. 비단.. 2025. 3. 23. 입춘대길의 '春'.....봄 '춘'자라고? -휘준- © deDaisy, 출처 올해 우리 절기 입춘일은 2월 3일이었죠? 입춘은 대한과 우수 사이에 있는 절기로 24 절기 중 첫 번째 절기입니다.농가에서는 입춘날, 보리 뿌리를 캐어 지역마다 갖가지 방식으로 그해 농사의 풍흉을 점치곤 했답니다. 입춘 날 날씨가 맑고 바람이 없으면 그해 풍년이 들고, 눈·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면 흉년이 든다는 속설. 이것은 우리 조상님들이 믿어왔으니 우리는 그냥 따르는 게 효孝인 줄 알고 지냈고, 이 속설에 맞서 대문에 붙여온 문구가 立春大吉입니다. 입춘대길의 ‘春’이 봄‘춘’ 자일 까요? / 휘준아닙니다. 일상에 쓰이는 말속에 진리가 들어있습니다. 우리는 설날을 명절이라고 부릅니다. 명절(明節)을 한글로 쓰면 '밝은 절기’ 맞죠? 밝은 절기, 설날은 한 해가 새롭게 시작되.. 2025. 3. 22. 인연 -피천득- 因 緣 -피천득-지난 사월 춘천에 가려고 하다가 못 가고 말았다. 나는 성심여자 대학에 가보고 싶었다. 그 학교에 어느 가을 학기, 매주 한 번씩 출강한 일이 있다. 힘든 출강을 한 학기 하게 된 것은, 주수녀님과 김수녀님이 내 집에 오신 것에 대한 예의도 있었지만 나에게는 사연이 있었다.수십 년 전 내가 열일곱 되던 봄, 나는 처음 동경(東京)에 간 일이 있다. 어떤 분의 소개로 사회 교육가 미우라(三浦) 선생 댁에 유숙을 하게 되었다. 시바꾸 시로가네(芝區白金)에 있는 그 집에는 주인 내외와 어린 딸 세 식구가 살고 있었다. 하녀도 서생도 없었다. 눈이 예쁘고 웃는 얼굴을 가진 아사코(朝子)는 처음부터 나를 오빠같이 따랐다. 아침에 낳았다고 아사코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하였다. 그 집 뜰에는 큰 .. 2025. 3. 20. 이전 1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