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바람, 스쳐간 세월의 숨결
제주의 8월, 섬은 온통 생명의 초록으로 뒤덮여 활기로 가득하다. 하지만 내게 제주의 여름은 늘 바람으로 시작되고 바람으로 끝난다. 공항을 나서자마자 훅 끼쳐오는 습하고 더운 공기, 그리고 그 속을 휘젓는 바람. 그 바람은 육지의 것과는 다르다. 단순히 시원함만을 주는 것이 아니라, 대지를 휘감고 온 바다를 건너오며 수많은 이야기를 싣고 오는 듯하다.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에 귀 기울이다 보면, 지난 세월의 소곤거림이 들려오는 착각마저 든다.
8월의 제주는 뜨겁지만, 그 더위를 식히는 것은 바로 이 바람이다. 한라산 능선을 타고 흘러내려오는 바람은 땀에 젖은 이마를 부드럽게 쓰다듬고, 바닷가 모래밭을 가로지르는 바람은 지친 몸을 위로한다. 바람은 형태도 없고 잡히지도 않는다. 그저 왔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 뿐이다.
젊은 날의 나는 이 바람처럼 살고 싶었다. 거침없이 부딪히고, 자유롭게 유영하며, 아무것도 얽매이지 않는 삶. 하지만 70년의 세월을 살아보니, 바람은 그저 왔다가 사라지는 것만이 아니었다. 바람은 지나온 모든 것을 어루만지고, 다독이며, 때로는 모든 것을 흔들어 깨우는 존재였다. 나의 지난 70년 삶 역시 그러했다.
어떤 해는 잔잔한 미풍처럼 평화로웠고, 어떤 해는 태풍처럼 거친 소용돌이 속에서 모든 것을 휩쓸고 지나갔다. 젊은 시절의 치기 어린 오만함도, 때로는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웠던 시절도, 이 8월의 뜨거운 바람처럼 쉼 없이 흘러갔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그 거친 바람이 할퀴고 지나간 자리에는 늘 새로운 생명이 움트고, 흔적들이 남았다. 상처 같았던 기억들도 시간이 지나고 바람이 훑고 나면, 그것이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든 귀한 자양분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8월의 바람이 흔적 없이 지나가는 듯 보여도, 그 바람은 제주 땅 깊숙이 스며들어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그리고 사람들의 가슴속에 자신의 흔적을 남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의 속삭임 속에서, 나는 망각과 기억 사이를 오가는 내 인생의 페이지들을 한 장 한 장 넘겨본다. 지나온 시간의 수많은 파동들이 바람에 실려 내게 돌아오는 듯한 묘한 감정에 휩싸인다.
묵묵한 돌, 시간의 무게를 견디다
제주에 도착하면 바람만큼이나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돌이다. 현무암으로 쌓아 올린 밭담, 거친 파도에 깎이고 닳은 해안가의 기암괴석들, 그리고 한라산 정상의 돌무더기까지. 제주는 그야말로 돌의 섬이다. 바람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하는 삶의 시간을 상징한다면, 돌은 변치 않는 본질과 오랜 인내를 의미하는 듯하다. 이 8월의 작열하는 태양 아래, 묵묵히 서 있는 돌담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저 돌담들은 얼마나 많은 비바람과 태양의 시련을 견뎌냈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를 들었을까.
젊은 날에는 돌의 묵묵함이 때로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빨리 가고, 더 많이 얻고, 더 높이 오르고 싶었던 나의 젊은 열정은 돌의 느릿함과 대조되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세상의 속도를 조금씩 놓아주게 되면서, 나는 돌의 진정한 가치를 깨달았다. 돌은 서두르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제 역할을 할 뿐이다. 거친 바람이 몰아쳐도 흩어지지 않고,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어도 녹아내리지 않는다.
제주의 밭담은 경계와 울타리의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삶의 지혜를 담고 있는 조형물이었다. 그 안에 삶의 고난을 인내하는 법, 그리고 흔들리지 않고 뿌리내리는 법이 새겨져 있는 듯했다. 특히 해안가의 바위들은 오랜 세월 파도에 깎이고 부서지면서도 자신만의 독특한 형상을 만들어냈다. 날카로웠던 모서리는 부드러워지고, 표면에는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새겨졌다. 그것을 만져보니 매끄러우면서도 단단한 그 감촉에서 묵직한 위로가 느껴졌다. 마치 오랜 세월의 지혜가 담긴 현자의 손을 잡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러한 돌들은 나에게 변치 않는 가치와 본질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었다. 삶의 소용돌이 속에서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중심을 지키는 강인함. 그것이야말로 70년의 세월이 나에게 가르쳐준 가장 귀한 보석이었다. 스마트폰 화면에 갇혀버린 시선을 잠시 거두고, 자연의 흙과 돌을 맨손으로 만져보는 것. 그 촉감을 통해 나는 잊고 있던 면대면 소통, 그리고 나 자신과의 진정한 대면을 경험했다. 돌의 침묵 속에서 나만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오는 순간이었다.
시간의 흔적 속에서 피어난 나의 여름, 삶의 고유한 지문
바람과 돌, 그리고 그 속에 스며들어 살아온 제주의 사람들.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제주는 그 자체로 살아 숨 쉬는 박물관과도 같다. 8월의 뜨거움 속에서 나는 다시금 나의 여름, 즉 내 삶의 한가운데를 되돌아본다. 스쳐 지나간 바람처럼 덧없는 시간 속에서도, 돌처럼 굳건히 남아있는 나의 본질과 기억들이 있다. 어쩌면 인생이란, 바람처럼 흘러가는 시간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돌처럼 변치 않는 자신만의 가치를 찾아가는 여정이 아닐까.
제주의 8월 밤바다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봤다. 끝없이 펼쳐진 어둠 속에서 별들은 바람의 노래를 들으며 영원히 빛나고 있었다. 그 별빛 아래에서 나는 깨달았다. 인생의 모든 순간이 바람처럼 덧없고 흘러가는 것이라 해도, 그 흔적들은 돌처럼 굳건히 남아 나라는 존재의 고유한 지문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나의 기쁨과 슬픔, 성공과 실패, 그 모든 굴곡과 희로애락이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소중한 시간의 흔적들인 게다. 나는 그 흔적들 속에서 비로소 진정한 평온과 함께 황혼의 여유로움을 찾았다.
이제 나는 이 바람과 돌의 지혜를 삶의 나침반 삼아 나아갈 것이다. 매일경제 뉴스 3개를 읽고 투자 목표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삶의 풍파 속에서도 자신만의 중심을 지키고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임을 제주에서의 여름이 다시 한번 일깨워주었다.
제주에서 얻은 이 깊은 깨달음은 단순한 추억을 넘어, 내 앞으로의 글쓰기와 생활에 묵직한 영감을 불어넣을 것이다. 70년 인생의 깊이를 담아낸 글을 쓰고,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가는 나의 여정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제주, 고맙다. 너는 나에게 단순히 여름의 풍경을 넘어, 삶의 진정한 의미를 가르쳐주었다. 다음 여름에도, 또 다른 모습으로 너를 만나러 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