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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새벽 비속 오색에서 대청올라 백담까지

by 휘주니 2025. 10. 19.

설렘은 짙은 어두움에서

어둠이 세상의 모든 윤곽을 삼켜버린 2025년 10월 15일 새벽 세 시, 저는 설악산 오색약수터 입구에 섰습니다. 작년 칠순기념산행으로 두 번 올랐던 산인데도 자연이 주는 숭고함 앞에서는 언제나 소년처럼 설레고, 때로는 미지의 두려움에 잠시 숙연해지곤 합니다. 이날의 설렘은 짙은 어둠만큼이나 깊었습니다. 희미한 헤드랜턴 불빛에 의지해야만 겨우 한 발자국을 내디딜 수 있는 칠흑 같은 밤, 하늘에서는 미세한 부슬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빗줄기가 아니었습니다. 존재의 미미함을 깨닫게 하는 서늘한 침묵이자, 동시에 산이 제게 건네는 묵직한 환영의 인사이기도 했습니다.

 

오색에서 대청봉으로 향하는 오르막길은 익히 알던 것보다 훨씬 가파르고 길게 느껴졌습니다. 빗물에 젖어 미끄러운 바윗길과 흙길을 오르며, 한 걸음 한 걸음에 집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순간들이 거듭되었습니다. 불과 몇 시간 전의 도시 풍경이 아득히 멀게 느껴질 만큼, 이곳은 시간과 공간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또 다른 세상이었습니다. 비는 멈출 줄 모르고 이어졌지만, 오히려 그 빗소리가 주변의 모든 잡념을 씻어내어 정신을 맑게 하는 듯했습니다. 몸은 피로를 느끼기 시작했으나, 왠지 모를 충만함이 마음 한구석을 채웠습니다.

어둠은 언젠간 걷힌다

새벽 일곱 시, 어둠이 서서히 걷히고 희뿌연 여명이 비에 젖은 산등성이를 부드럽게 감쌀 무렵, 저는 비바람이 몰아치는 오르막길 한편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흠뻑 젖은 몸을 애써 외면하며 차갑게 식어버린 도시락을 꺼냈습니다. 빗줄기가 도시락 뚜껑 위로 투둑투둑 떨어지는 소리, 차가운 공기와 젖은 흙 내음이 어우러진 그곳에서의 식사는 여느 고급 레스토랑의 만찬보다 더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 한 조각의 김밥, 한 입의 찬밥이 주는 에너지는 단순한 영양분 이상의 의미였습니다. 자연의 섭리 앞에서 인간의 욕심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지, 그리고 얼마나 작은 것에 행복을 찾을 수 있는지를 깨닫게 하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이는 크리에이터로서의 저의 글쓰기 철학인 '삶의 본질'을 다시금 되새기게 하는 경험이었습니다.

 

장장 다섯 시간에 걸친 고행 끝에, 오전 여덟 시 이십 분, 드디어 설악산의 심장, 대청봉에 발을 디뎠습니다. 사방은 여전히 구름과 안개에 휩싸여 비현실적인 풍경을 자아냈습니다. 비록 장엄한 설악의 파노라마를 온전히 감상할 수는 없었지만, 뿌연 안개 너머로 희미하게 비치는 단풍의 붉고 노란빛은 몽환적인 아름다움을 선사했습니다. 빗물에 젖어 더욱 선명하게 빛나는 그 색채들은 마치 수묵화 같았습니다.

 

저는 서둘러 카메라를 들고 그 순간의 아름다움을 포착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쉽지 않은 작업이었지만, 빗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굳건히 제 색을 내는 단풍나무들을 담아내며 그들의 생명력에 깊이 감탄했습니다. 비록 대청봉에서 봉정암으로 향하는 길목까지 부슬비는 쉬지 않고 저의 길동무가 되어주었으나, 오히려 그로 인해 산의 정취는 더욱 깊어졌습니다. 단풍잎마다 맺힌 영롱한 물방울들은 자연이 선사하는 작은 보석 같았습니다. 저는 만족할 만큼 충분히 그 비경을 사진으로 담아낼 수 있었음에 큰 기쁨을 느꼈습니다.

깊은 산속 적멸보궁 봉정암

오전 열한 시, 깊은 산속 암자 봉정암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은 단순한 휴식처를 넘어 수행자의 고요함이 배어 있는 성지였습니다. 비바람에 지친 몸을 이끌고 들어서자, 온화한 표정의 공양주 보살님이 따뜻한 국 한 그릇과 함께 무료 공양을 권하셨습니다. 새벽 비 속에서 차가운 도시락으로 때웠던 아침을 생각하면, 봉정암에서 베풀어 주신 따뜻한 점심 공양은 몸과 마음을 녹이는 감로수와 같았습니다. 땀과 빗물로 끈적였던 등산복과는 대조적으로, 갓 지은 밥과 김치, 따뜻한 국물은 소박하지만 더할 나위 없이 넉넉한 위로였습니다. 그 맛은 단순한 음식의 맛을 넘어, 자비로운 베풂과 사람의 온기가 담긴 정성의 맛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얻은 충전은 남은 하산길을 이어갈 소중한 에너지가 되어주었습니다.

 

이후 수렴동 대피소를 거쳐 백담사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은 발걸음이 무거워지면서도, 동시에 내면의 성장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산이 허락한 만큼만 길을 내어주고, 우리는 그 길을 묵묵히 따를 뿐입니다. 온종일 이어진 비는 산의 모든 색을 더욱 깊고 진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젖은 단풍은 한층 고혹적인 자태를 뽐냈고, 저는 그 아름다움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수없이 멈춰 서야 했습니다. 비록 몸은 지쳐갔지만, 영혼은 더욱 생생하게 깨어나는 듯했습니다. 사진 촬영은 단순한 기록을 넘어, 제 내면의 창조적 몰입을 이끌어내는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 빗속의 산행이라는 쉽지 않은 도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마음껏 아름다운 단풍 사진을 찍을 수 있었음에 지극히 만족감을 느꼈습니다.

드디어 백담사

오후 네 시 삼십 분, 드디어 백담사 주차장에 당도했을 때, 저의 온몸은 이미 한계를 넘어선 듯했습니다. 젖은 옷과 신발, 욱신거리는 다리가 고단했던 하루를 증명해 주었지만, 그 얼굴에는 알 수 없는 희열과 만족감이 서려 있었습니다. 마치 거친 파도를 헤치고 돌아온 배처럼, 제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냈다는 뿌듯함이 밀려왔습니다. 백담사 셔틀버스를 타고 용대리에 도착하니 오후 다섯 시 정각. 긴 하루의 여정은 완벽하게 마무리되었습니다.

 

설악산의 깊은 품속에서 보낸 새벽부터 해질녘까지의 시간은 단순한 등반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저 자신의 한계와 마주하고, 자연의 위대함 앞에서 겸허해지며, 동시에 삶의 본질과 마주하는 성찰의 여정이었습니다. 빗속을 걷는다는 고행 속에서 역설적으로 더욱 선명해지는 단풍의 빛깔처럼, 저는 고난 속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진정한 아름다움을 만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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