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고교 졸업한 지도 벌써 50년이 넘었죠? 아득한 옛날인데도 선생님 중에는 요즘에 뵌 분같이 낯설지 않은 분도 계십니다. 그중 교실에 들어오시자마자 칠판으로 돌아서서 판서부터 하는 선생님이 생각납니다.. 들어오시면 인사부터 받고 시작하는 관습까지 잊으신 겁니다. 정년이 가까우신 할아버지 선생님은 노망끼가 조금 있었으나 판서 솜씨는 일품이셨습니다..
20분쯤 쓰고 돌아서서 "빨리 베껴!" 하시곤 손가락의 분필 가루를 입으로 요리조리 불면서 5분 더 기다려 주시고 5분쯤 설명하시던 선생님. 그렇게 두 번 하다 종이 울리면 또 인사도 안 받고 그냥 사라지던 선생님. 어떤 땐 환청으로 들으신 양 종소리도 없었는데 그냥 나가시는 날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쉬는 시간이 늘어나 마냥 좋았습니다.
그 선생님은 귀도 조금 어두운 편이었으나 예절을 무척 중시한 노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수업 중에 나가서 인사만 깍듯이 하고 화장실 가겠다고 하면 돌아오지 않아도 모르셨습니다. 우리 반의 골목 농구 네 명은 그 시간에 나란히 나가서 농구하곤 했습니다. 그것은 다른 반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선생님의 건망증은 보호되었고 우리는 선생님이 학교에 오래오래 다니시기를 바랐습니다.
어느 봄날 나른한 오후 마지막 시간이었습니다. 필기 소리만 사각사각 들리는 게 무료해서 나는 장난을 걸었습니다. 젓가락으로 빈 도시락을 한 번 쳤더니 창 쪽에 넙치가 두 번을 받아쳤습니다. 세 번 치자 곧 네 번이 울렸습니다. ‘짜식이 뭘 아네?’ 교신 소리의 크기를 조금씩 높였습니다. 어느 소리부터 선생님께 들킬까? 가 우리의 관심사였지요.
"쿵 따라락따 딱딱"
내가 일곱 번을 쳤을 때 선생님이 돌아보셨습니다. 어느 놈이 장난치느냐는 버럭 소리에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는데, 내 짝꿍은 웃음을 참지 못해 걸렸습니다. 그래서 불려 나가 따귀를 한 대 맞았습니다. 친구는 자기는 웃기만 했을 뿐 장난치지는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예절을 중히 여겼던 선생님은 어린 녀석이 어디서 말대꾸냐고 호통을 치시다가 흥분하셨는지 한 대를 더 때리셨습니다. 그 시대엔 그렇게 억울한 매도 꼼짝없이 맞고 자랐습니다. 그 선생님 옆자리엔 조선어학회에서 사환 일을 하시다 옥고를 치르신 선생님도 계셨습니다.
그분은 매우 인자하셨기에 별명이 ‘조선어학회’였지만, 건망증 선생님의 별명은 당연히 ‘일본놈학회’였죠. 일본놈학회도 뭐 따귀 빼곤 그럭저럭 괜찮았습니다. 두 할배 선생님은 매우 대조적이었습니다. 울먹이는 친구도 조선어학회에겐 칭찬만 받았는데, 일본놈학회는 버릇없는 놈으로 봤습니다.
제 자리에 돌아와서도 분을 참지 못하던 친구는 갑자기 벌떡 일어났습니다. 옆에 있던 걸레통을 들고 앞으로 나갔습니다. 선생님은 놀라서 멀뚱히 계셨고 친구는 그냥 밖으로 나가버렸습니다. 다시 판서는 계속됐고 걸레통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하굣길 벤치에서 걸레통과 함께 있는 친구가 보였습니다. 우리는 뭐하냐고 큰소리로 물었지만 울먹이는지 대답이 없습니다. 반장이 다가섰습니다.
"네가 아무 짓도 안 한 거 우리도 아니까 내일 선생님께 말해 줄게."
매 맞은 친구는 마음이 좀 풀렸는지 고개를 들었습니다.
"으-흑."
내가 물었습니다.
"야 근데, 걸레통은 왜 갖고 나왔냐?"
녀석이 대답했습니다.
"아 씨바, 난 책가방인 줄 알았다. ㅠ.ㅠ"
선생님께 억울한 매도 맞고 '걸레통'과 웃고 자라던 그 시절 그때가 그립습니다.
우리 ‘공부못클럽’에서 농대 갔다가 유일하게 교수가 된 친구. 우리 중 가장 별명이 멋졌던 '걸레통'. 그는 우리에게 제일 먼저 인생의 허무를 알려준 친구이기도 합니다. 작년에 칠순 생일을 먹고 갑자기 하늘길 방랑자가 된 친구, 더욱 보고 싶습니다.
https://youtu.be/A2GCa5Y6NVQ?si=B6qZmRp7dgqjDh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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