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식한 걸 고칠 약은 어디에도 없다네
5년 전 처음 안경을 썼을 땐 생각보다 훨씬 선명히 보인 세상에 감탄했었다. 안경의 위력이 신기하기도 하여 그것을 벗어 이리저리 뜯어보기도 했었다.
당시 텔레비전 화면이 흐린 것은 낡은 기계 탓이므로, 어느 때고 화질이 조금 더 나빠진 때 즉각 바꾸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안경을 쓰고 보니까 화면이 그렇게 잘 보일 수가 없었다. 멀쩡한 재산을 버릴 뻔했다.. 반년 가까이 텔레비전 탓만 하며 흐릿한 화면을 보아온 나의 우매함은 그래서 그 끝이 유쾌했었다.
그러나 요즘에 나타난 나의 무지는 그렇지 않다. 책을 볼 일이 많아졌고 모니터부터 켜야 되는 업무 앞에서 눈이 쉬이 피로해지기에 안경 탓을 했었다. 하지만 멀쩡한 안경이 아깝기도 하여 지금보다 조금 더 글씨가 흐리게 보이는 날 새것을 맞추기로 했었다.
눈은 언제든 안경만 바꾸면 문제없는 것이므로 늦게 교체할수록 이익이라는 알뜰한 마음이 독서의 능률이나 눈의 시원함보다 앞서 있었다.
그런데 며칠 전 내가 D-day로 정한 날이 왔다. 글씨가 더 흐려져서 돈을 들이기로 한 날이다. 안경점에서 묵직한 실험테에 이것저것 씌워줬는데, 많은 렌즈가 죄다 시원찮았다. 한참을 애쓰던 안경사는 렌즈로 시력교정을 할 수 없으니 병원에 가보라는 것이었다. 그래도 병원을 서둘러 찾지는 않았다. 아무 때고 병원 장비로 측정한 표를 가져가면 안경점에서 맞출 수 있을 것이란 생각 때문이었다.
어젠 장모님 진료 때문에 대형 안과 전문병원에 갈 일이 있었다. 단과 병원인데도 그 규모가 얼마나 크고 입원실이 많은지 종합병원 못지않았다. 가난하게 시작한 안과의사가 얼마나 돈을 벌었으면 이 큰 빌딩을 두 채나 지었을까 하는 놀라움이 앞섰다.
예약을 못하고 온 사람들은 반나절은 예사로 기다릴 만큼 환자들이 많았다. 환자 머릿수는 곧 돈이라는 인식에서 복도에 걸린 이런 문구를 비웃었다.
‘건강한 사람도 중년엔 1년에 한 번 이상 눈 검사를 받아야 합니다.’
내가 중얼거린 말은 사실 경박했다.
"내과에 가면 6개월마다 내시경 하라 하지, 치과에서도 그러지, 병원 과마다 다 따라다니면 일 년 내내 병원 다니겠다. 인간들아, 다 장삿속이지?"
장모님 진료가 오후까지 이어지면서 아내는 몰래 내 진찰을 신청했고 졸지에 이름을 호명당한 나는 그제야 나도 안과 환자임을 기억했다. 아내 덕에 진료를 받은 결과 사물은 각막-수정체-안압-망막-시신경-뇌가 모두 정상이어야 보이며 안경은 그 중 수정체를 돕는 역할에만 효과가 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이틀간의 정밀검사 끝에 나의 병은 중심 망막염증이라고 했다. 내 눈은 안경으로 교정이 안 되며 영상이 맺히는 망막 중앙 부위의 염증이 치료되면 안경이 꼭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망막의 중심은 수술이 불가능한 부위여서 약물로만 치료하여야 한단다. 망막염증, 중년의 나이에 까닭 모르게 올 수 있는 증세가 내게도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상처가 오래 방치되어 있었으므로 치료기간은 몇 달이 필요하단다.
그래서 매우 비싼 약이 한달치 씩 처방되었다. 한 달마다 경과를 보자는 것이었는데 술을 참지 못해 두 달이 넘도록 그 약을 다 먹지 못했다. 이 사실을 의사에게 설명하기가 궁색해서 아직도 병원에 재차 못 가고 있다.
텔레비전을 바꿀 게 아니라 시력 교정이 필요한 때가 있었다. 5년 뒤엔 시력 교정이 필요한 게 아니라 영상 전달 장치의 수리가 필요한 때가 있었다. 건강에 대한 자만심 때문에 내 마음대로 진단했던 잘못도 몇 달의 약물치료로 지울 수 있었다.
그러나 알면서도 치료를 포기한 병까지 낫는다면 신은 너무 너그러우시지 않을까. 인체는 어느 기관이던 병이 든 뒤에도 방치해선 큰일 난다는 것을 깨달은 날, 깨달음이 있어도 5년 전과는 달리 유쾌할 수 없는 날이었다. (200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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