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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아버지와 김 -휘준-

by 휘준차 2025. 3. 29.

아버지! 오늘은 30년쯤 거스른 이야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중3이 되던 봄, 국가대표 선수들만 갈 수 있는 태릉선수촌에 입촌하게 되었을 때

아버진 관심 없는 듯 덤덤해하셨지만 저는 세 가지 감동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어마어마한 시설이었고, 둘째는 TV로만 보던 스타선수들과 같이 생활하게 된 뿌듯함이며,

셋째는 당시로선 획기적인 자유배식제도였습니다.

셋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자유배식이었습니다.

 

이상하게만 보였던 후라이드 치킨과 양식요리들,

밥이 아닌 것으로만 배를 채워도 되는 세상을 처음 보았습니다.

무엇이던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자유와 몸무게가 늘면 호된 기합을 받던 억압이 공존했던 사회.

선수촌 생활은 천국 같은 기억과 지옥 같은 훈련이 뒤섞인 추억입니다.

아버지와 밥을 먹다 꿀밤을 맞았는데 매우 아팠습니다.

 

운동선수에겐 꿈의 요람이던 그곳으로 합숙훈련을 떠나던 날,

우리 집 밥상이 여느 때와 달랐던 건 어머니의 배려였다고 생각됩니다.

고깃국과 기름에 재어 구운 김과 달걀찜이 있는,

일 년에 몇 번밖에 구경할 수 없는 밥상에서 밥을 먹다가 저는 아버지께 머리를 쥐어 박혔지요.

 

밥을 말은 국에 김 조각을 띄워 수저로 다독인 뒤 밥을 뜨면,

흐물흐물 사그라진 김이 수저에 얌전히 얹히고 김의 까실함도 없어져서 먹기도 좋고 맛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먹다가 아버지께 얻어맞은 것입니다. 수저를 문 채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이놈의 자식, 밥 먹으면서 무슨 장난질이야?”

 

밥 먹을 땐 개도 안 때린다는 어머니의 역성을 등에 달고 밥도 다 못 먹은 채

그날 저는 아버지 품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자유배식을 만났습니다.

말만 들었을 땐 믿기지 않던 뷔페식당이 무척 신기했습니다.

 

처음 보는 트레이닝 센터와 호사스러운 침식을 제공받으며 전 아버지를 생각했습니다.

아버지는 이런 세상이 있는 걸 알기나 하실까, 왜 그러셨을까?

아버지는 그저 운동 때문에 공부 못하는 자식이 미워서 그러셨을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인가 잠결이었습니다. 제 머리맡에서 어머니와 나누시던 아버지의 독백에 놀란 때는.

먹성 좋은 녀석이 밥 한 숟갈에 반찬을 세 가지(, , 콩나물)나 먹는 게 밉살스럽더라구…….”

 

잠결이었지만 평생 잊히지 않는 충격이었습니다.

한참 먹을 나이고 또 운동선수 아니냐는 어머니의 역성을 다시 들었습니다.

감은 눈에 핑 도는 눈물을 들킬까 봐 이불을 뒤집어썼습니다.

그때 저는 이상하게도 이다음에 크면 아버지께 잘해드리겠다는 다짐을 하며 울었습니다.

왜 어머니보다 아버지께 효도를 다짐하며 울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얼마나 살림이 어려웠으면 그러셨을까?

그럴 수 있다, 세상에 다른 아버지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식의 먹성까지 미운 아버지의 가난은 연민입니다.

 

아버지, 저는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쉰이 다된 공무원으로서

지금의 위치가 만족스럽진 못하지만 아버지의 뜻에 따른 길임에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제가 중학교에 진학했을 때 아버진 명문사립이라고 무척 좋아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쩌다 운동부에 뽑혔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학교에서 놓아주질 않았기 때문에

고교 중반에야 어렵게 선수생활을 접을 수 있었고 그때 공부실력은 말이 아니었지요.

 

아버지의 반대가 아니라면 체육인으로의 성장이 무난했겠으나

뒤늦게 진로를 바꾼 것은 무모한 도전이었습니다.

운동과 공부사이에서 죽도 밥도 아닌 청소년기를 보낸 탓에 어려운 고비도 참 많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를 미워한 적은 없습니다.

정직하셨기에 가난을 헤치지 못하셨고

가난 때문에 운동선수를 키울 수 없었던 아버지의 회한을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오늘도 밥상에 김이 있었습니다. 한 조각을 국물에 띄워 먹다가 어미를 흘끔 보았습니다.

아버님 생각하느냐고 빙긋이 묻더군요.

그때 제 나이와 같이 중3이 된 막내도 따라먹길래

저는 녀석의 국에 김 한 장을 더 얹어 다독다독 적셔주었습니다.

짜다며 밥 한 수저를 얼른 더 먹는 먹성이 귀여워 쳐다보았지요. 그런데 어미는 눈을 흘겼습니다.

 

아들의 먹성을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는 오해의 눈치였습니다.

두 장씩 먹이려면 소금을 털어 내고 주라는 눈치였습니다.

김이 짜기 때문에 다른 반찬을 못 먹는 게 안타깝다는 눈치였습니다.

저는 오랜만에 눈칫밥을 먹었습니다.

 

아버지, 이다음에 녀석은 저를 얼마나 기억할까요?

세상에 누구든, 돌아가신 제 부모를 늘 기억하며 살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김이 흔한 세상을 사는 덕에 아버지를 자주 회상하게 됩니다.

그리고 내게도 그렇게 어려운 시절이 있었음을 쉽게 돌이키곤 합니다.

그것은 어느 것보다 값지고 선명한 아버지의 흔적입니다. 아버지!

(200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