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발을 디딘 오름의 고요
제주에는 수많은 오름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거슨세미오름은 조금 특별하다. 화려한 관광지가 아니고, 유명세를 떨치는 오름도 아니어서 더욱 조용하다. 오름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느껴지는 것은 사람보다 숲의 기운이 먼저라는 사실이다. 바람은 천천히 불고, 길은 완만하게 이어진다. 가파른 경사가 없어 누구든 부담 없이 오를 수 있다. 제주 사람들에게 오름은 생활 속 풍경이지만, 여행객에게는 늘 새롭다. 나 역시 수많은 오름을 올랐지만, 거슨세미오름은 첫발부터 남다른 편안함을 건네왔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벗이 조용히 손을 내밀어주는 듯했다.
길 옆에는 편백과 삼나무가 곧게 뻗어 서 있다. 나무들은 서로 경쟁하지 않고 나란히 자라며 숲을 이룬다. 햇빛은 나뭇잎 사이로 스며들어 반짝이는 조각들이 되어 흩어진다. 걷는 내내 햇살은 눈부심이 아니라 온화한 빛으로 어깨를 덮어주었다. 도시에서라면 건물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햇빛이 답답하게만 느껴질 때가 많은데, 이곳에서는 빛마저도 한결 자유롭고 부드럽다. 그래서일까, 오르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몸이 가벼워지고 마음도 여유로워졌다.
특히 평일 오전, 거의 사람이 없는 시간대에 걷다 보면 숲길은 온전히 나만의 것이 된다. 들리는 것은 바람의 소리, 새들의 지저귐, 그리고 발밑에서 바스락거리는 낙엽뿐이다. 이 고요함 속에서 나는 잠시 내 호흡마저 의식하게 된다. 도시에서 늘 분주히 뛰던 심장이 차분해지고, 숨결 하나하나가 숲과 섞이는 듯한 기분이 든다.
편백숲이 건네는 위로
거슨세미오름의 가장 큰 매력은 단연 편백과 삼나무 숲이다. 편백나무 특유의 청량한 향기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은은하게 퍼져 나온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몸속이 정화되는 듯한 느낌이 드니, 이것이야말로 자연이 주는 최고의 선물이다. 삼나무는 키가 커서 하늘을 덮어주고, 편백은 그 사이사이를 채우며 숲의 향기를 짙게 만든다. 두 나무가 함께 만들어내는 풍경은 한 폭의 그림 같다.
길을 걷다 보면 곳곳에 앉을 수 있는 평상이나 나무 벤치가 보인다. 나는 그중 하나에 잠시 앉아 눈을 감았다. 그러자 귀에는 더 선명하게 바람의 노래가 들려왔다. 숲은 늘 같은 자리에 있지만, 그 소리는 늘 다르다. 계절에 따라, 시간에 따라, 심지어 내 마음의 상태에 따라 숲은 새로운 언어를 들려준다. 오늘의 숲은 내게 ‘천천히 가라’고 말했다. 언제나 서두르던 내 걸음에 브레이크를 걸어주는 말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한동안 숨을 고르며 앉아 있었다. 생각해 보니, 도시에서는 늘 앞만 보고 달리며 시간을 쫓았다. 마치 조금이라도 멈추면 뒤처질 것처럼. 그러나 이곳에서는 멈춤이 곧 쉼이고, 쉼이 곧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아무도 나를 재촉하지 않고, 아무도 경쟁하지 않는다. 숲 속에서의 시간은 오직 나의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편백숲 속에서의 짧은 휴식이 내 마음의 균형을 되찾아주었다.
또한 숲은 과거의 기억을 불러오기도 했다. 어린 시절 고향 뒷산을 뛰놀던 때가 떠올랐다. 흙길에서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 뛰던 그때의 기억은 세월이 흘러도 선명하다. 거슨세미오름의 숲길은 나에게 그런 원초적인 기억을 소환하며, 지금의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되돌아보게 했다. 숲은 단순히 걷는 공간이 아니라, 나의 과거와 현재를 연결해 주는 다리였다.
일상으로 돌아온 숲의 힘
거슨세미오름에서 내려와 다시 도시의 길로 들어섰을 때, 나는 이상한 가벼움을 느꼈다. 불과 두 시간 남짓 숲길을 걸었을 뿐인데, 어깨를 짓누르던 무게가 사라진 듯했다. 아마도 그것은 숲이 준 선물일 것이다. 숲은 언제나 묵묵히 서서 사람을 맞이하고, 말없이 위로한다. 우리는 그 안에서 잠시 자신을 내려놓고, 새 힘을 얻는다.
여행이란 결국 일상으로 돌아와 어떤 변화를 만들어내는지가 중요하다. 거슨세미오름을 다녀온 후, 나는 ‘조금 더 천천히 살아도 괜찮다’는 생각을 자주 떠올린다. 바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도 잠깐 눈을 감으면, 숲길에서 맡았던 편백향이 다시 떠오른다. 그 향기만으로도 복잡한 마음이 정리된다.
또한 숲에서 배운 ‘함께 어우러짐’은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중요한 가르침이 된다. 나무들이 서로를 해치지 않고 나란히 서 있듯, 우리 역시 경쟁보다 공존을 배워야 한다. 삶에서 부딪히는 수많은 갈등 속에서도, 거슨세미오름의 숲을 떠올리면 조금은 너그러워질 수 있다. 그것이 자연이 주는 지혜일 것이다.
나는 앞으로도 제주를 찾을 때마다 바다와 오름, 그리고 숲을 번갈아 걸을 것이다. 특히 거슨세미오름은 그중에서도 가장 조용하고 따뜻하게 나를 맞아줄 장소다. 이름조차 낯선 이 오름이 내게는 ‘마음의 안식처’라는 특별한 이름으로 남게 되었다.
거슨세미오름은 눈길을 사로잡는 화려한 관광명소는 아니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이 오름의 가장 큰 매력이다. 소란스러운 음악도, 현란한 조명도, 기념품을 권하는 가게도 없다. 그저 완만하게 이어지는 흙길과 양옆으로 곧게 솟아오른 편백과 삼나무들이 전부다. 그러나 이 소박한 풍경 속에서 오히려 더 깊고 묵직한 울림이 전해진다. 사람의 손길이 적은 숲은 늘 그렇듯, 자기만의 언어로 우리와 대화를 시작한다.
오름의 둘레길을 천천히 걸으면 발걸음마다 숲이 내는 숨결이 다가온다. 바람이 가지 사이를 스칠 때마다 은은한 송진 냄새가 퍼지고, 잎사귀들이 서로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소리는 마치 자연이 속삭이는 합창처럼 들린다. 그 순간, 우리는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듣는 법을 배우게 된다. 숲은 한 번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지만, 늘 그 자리에 서서 우리에게 쉼과 위로를 건넨다.
길을 걷다 보면 문득, 오름이 나에게 말을 거는 듯한 기분이 든다. “급히 달리지 않아도 괜찮다. 한 걸음 한 걸음, 네 호흡에 맞추어 이 길을 즐겨라.” 그러면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늦춰지고, 눈길은 땅 위의 작은 풀꽃이나 나무껍질의 결까지 머물게 된다. 일상에서는 미처 눈여겨보지 못했던 소소한 풍경들이 이곳에서는 유난히 선명하게 다가온다. 숲은 늘 곁에 있었지만, 내가 너무 바쁘게 살아가느라 그 존재를 외면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여행과 마음의 태도
여행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흔히 멀리 떠나는 것,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이라 여기지만, 사실 여행은 마음의 태도에 달려 있다. 거슨세미오름의 둘레길은 그것을 보여준다. 화려한 조경이나 인위적인 시설 없이도, 그저 숲길 하나로 충분히 여행이 된다. 몸을 움직이며 걷는 동안 마음속의 무거운 짐들이 조금씩 흘러내리고, 숲의 기운이 대신 채워진다. 마치 일상의 먼지를 가볍게 털어내는 의식처럼, 오름을 걷는 일은 우리를 한결 맑고 투명하게 만든다.
이 숲을 다녀온 날 저녁, 집에 돌아와도 여운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머릿속에는 삼나무 숲 사이로 비추던 햇살과, 땅에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던 내 발걸음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마음속에서는 알 수 없는 평안함이 오래도록 이어졌다.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단지 천천히 숲을 걸었을 뿐인데, 그 하루가 내 삶을 조금 더 부드럽게 만들어 준 것이다.
바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을 때, 꼭 멀리 가지 않아도 좋다. 거슨세미오름처럼 조용한 숲길 하나면 충분하다. 그 길 위에서 우리는 다시 호흡을 고르고, 다시 균형을 찾고, 다시 웃을 수 있다. 여행의 의미는 바로 그런 회복에 있다.
그러니 혹시라도 지치고 답답한 날이 온다면, 거슨세미오름의 숲을 찾아 천천히 걸어보자. 그 길 끝에서 우리는 조금 더 가벼워진 자신, 그리고 조금 더 따뜻해진 마음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 만남이야말로 이 오름이 우리에게 건네는 가장 값진 선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