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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윤여선의 土曜斷想 : 중·고·대학 10년 공부, 영어 벙어리

by 휘준쭌 2025. 8. 23.

[토요 단상(土曜斷想)] (2025.08.23]
========={제 198회}=======

 

며칠 전에 핸드폰에 문제가 있어서 통신사 영업소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용량이 부족해 매번 저장 정보를 지우라는 지시문이 올라와 귀찮아하던 중, 마침 용량이 큰 핸드폰을 판매한다기에 이를 상의하러 갔던 것이지요. 소파에 앉아 기다리고 있는데, 바로 앞의 상담 고객이 외국인이라서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이었습니다.

영어 벙어리

영어를 하는 것으로 보아 미국인이나 영국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상담 내용을 알 수 없지만, 문제는 카운터 직원이 영어를 못하는지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었지요. 둘이 핸드폰을 이용해 의사소통을 하느라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이었습니다.

 

핸드폰의 번역기에 말을 집어넣으면 기계가 번역하고, 이를 상대방에게 보여주며 대화를 하니 시간이 많이 걸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그 모습을 지켜보노라니 답답한 생각으로 한숨이 나왔습니다.

 

10년을 공부해도 영어 벙어리

 

국내 유수의 통신사 영업소 직원이면 대학 정도는 졸업했을 것이고, 중학교에서부터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하더라도 최소한 10년 이상은 했을 텐데, 말 한마디 못하고 번역기를 이용해 외국인과 의사소통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통신사 영업소에서 쓰는 영어는 일반 사회에서와 달리 대화 내용과 용어의 폭이 넓지 않고 단순해 조금만 익히면 쉽게 대화할 수 있을 텐데, 그러지 못하고 번역기를 사용하고 있다는 게 무척 답답해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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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일을 마치고 돌아와서도 그 영업소에서 보았던 일이 자꾸 뇌리에 떠올랐습니다. 10년 이상의 영어공부를 하고도 외국인과 말로써 대화를 못하고 번역기를 통해야 하는 우리나라 영어공부의 현실에 답답함이 느껴졌지요. 아무리 되짚어 생각해도 그것은 그 영업소 직원의 잘못만은 아니리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영업소 직원이 외국인 고객을 상대하면서도 입 한 번 벙끗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분명히 우리나라 영어교육이 잘못된 탓이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영어교육이 회화보다는 문법 위주로 되어 있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지요.

 

요즘은 많이 개선되어 학원 등을 통해 회화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만, 아직도 학교에서는 문법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학년이 높아질수록 문법과 어휘교육에 치중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때로는 이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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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EFL과 TOEIC


우리나라에서 영어 능력을 측정하는 수단으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TOEFL(Test Of English as Foreign Language)'과 'TOEIC(Test Of English for International Communication)'입니다. '토플'은 주로 미국 대학 입학 자격을 얻기 위해 치르는 시험이고, '토익'은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들의 영어 능력을 측정하기 위한 시험이지요.

 

문제는 이 특수한 시험이 마치 우리나라 영어 공부의 최종목표인 것처럼 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대기업이나 국가 공공기관에 취업할 때 필수적으로 징구하는 것이 이들 시험 성적서 중 하나이니, 학교, 특히 대학 과정에서 이 공부를 하지 않 수 없는 것이지요.

 

평생 한 번 써먹을까 말까 한 해괴한 영어 단어를 올려놓고 이와 의미가 비슷한 단어를 찾아내라는 식의 어려운 공부를 하느라 학생들이 회화 연습을 할 여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토록 어려운 영어공부를 하는 시간에 차라리 이태원의 잡화점 여 사장님을 만나 실무 영어회화를 배우는 것이 훨씬 실용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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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자주 떠오르는 기억이 있는데, 그것은 고등학교 때 선생님이 영어를 가르쳐 주시던 방식입니다. 그 당시에 중요하게 여기며 가르쳐 주셨던 것은 영어의 읽기나 말하기보다 문법이었고, 발음이었습니다. 영어 발음할 때 강세(stress)를 어느 부분에 주어야하느냐에 많은 시간을 할애해 가르쳐 주셨지요. 앞에 두느냐 뒤에 두느냐에 따라 뜻이 달라지니 이 위치를 잘 기억해 발음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the'나 ''a'와 같은 '정관사'나 '부정관사'의 사용법을 잘 익혀야 한다며, 이의 중요성을 수없이 강조하셨고, 복수와 단수의 구분을 잘해야 한다며, 이와 관련된 문법문제를 시험에 내셨지요. 이러한 문법 문제에 영어 공부의 태반을 소비하다 보니 정작 말하기나 듣기 공부에는 소홀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현직에 있을 때 세미나나 회의 참석등으로 동남아 세관 대표들을 만날 기회가 종종 있었는데,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홍콩, 싱가포르, 필리핀 사람들은 이런 문제에 크게 개의치 않는 것처럼 보였지요. 물론 그들이라 해서 영어 문법을 소홀히 여길 수는 없겠지만, 우리나라 사람들과 달리 그것에 애면글면하지는 않아 보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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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나 필리핀, 혹은 홍콩처럼 영어를 공용어로 삼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영어 사용 후진국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TOEFL이나 TOEIC 위주의 영어 능력 시험을 과감히 버리고, 새로운 평가 방법을 찾아야 하리라는 생각입니다.

형이상학적  사용보다 일상적 사용

 

공무원이나 회사원들이 해외 파견 전에 치르는 'LATT(Learning All The Time)' 영어 능력 평가 방식도 고려될 수 있지요.
LATT는 원어민과 직접 대화를 나눔으로써 영어 구사 능력을 평가받는 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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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언어학파의 창시자로서 20세기 전반기에 언어학을 이끌었던 오스트리아 출신 영국의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우리는 언어를 형이상학적 사용에서 일상적인 사용으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언어는 추상적이며 관념적인 연구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 생활 속에서 실제적인 사용을 통해 우리의 삶을 한 단계 높이는 수단으로 사용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문법을 제대로 갖춘 고상한 언어의 사용은 일단 의사소통이 이루어진 다음의 문제인 것이지요. 어린아이들이 앞 뒷말을 막 바꾸어가며 말을 익히다 점차 제대로 된 말을 구사하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말로써 의사소통도 못하는 사람에게 문법에 치중해 가르치는 우리나라의 영어 교육 방법을 고치지 않는 한, 대화 때마다 번역기를 들이대는 사람들이 늘어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통신사 영업소에서 본 그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처럼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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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윤여선(다니엘)/관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