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빛과 모래 질감이 다른 해변
제주도에는 해수욕장이 참 많다. 푸른빛이 다르고, 모래의 질감도 다르고, 바람의 결조차 다르다. 그중에서도 내가 유독 그리워하는 바다는 함덕해수욕장이다. 협재나 중문보다 조금 덜 유명하지만, 그만큼 덜 소란스럽고, 더 단정하다. 게다가 에메랄드빛 바다색은 제주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곱다. 사람들은 흔히 ‘몰디브 같은 색’이라고 표현하는데, 나는 그 말보다 ‘기분까지 씻어주는 물빛’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제주시에서 함덕해수욕장까지는 차로 약 30분 남짓. 그리 멀지 않은 거리이지만, 바다가 가까워질수록 도심의 공기가 차츰 바뀌는 느낌이 든다. 특히 여름철 아침에 도착하면, 햇살은 아직 부드럽고 바람은 상쾌하다. 나는 늘 오전 시간의 함덕을 좋아한다. 햇살이 바다 위를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물 위엔 아직 사람들이 많지 않아 온전한 고요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환상적인 바다빛
해변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 건 환상적인 바다빛이다. 투명한 옥빛 물결이 발끝까지 다가온다. 파도는 잔잔하고, 물속은 맑다 못해 발가락 사이까지 들여다보일 정도다. 마치 잔잔한 수면 아래에서 마음까지 투명해지는 기분. 나는 먼저 슬리퍼를 벗고 모래 위에 서본다. 함덕의 모래는 곱고 부드럽다. 다른 해수욕장보다 습기가 적고, 발에 잘 달라붙지 않아 걷기에 좋다. 자연스레 산책을 시작하게 된다.
모래사장 한쪽 끝에는 서우봉(西優峰)이 자리하고 있다. 작지만 단정한 오름으로, 함덕해수욕장의 풍경에 균형감을 준다. 서우봉에 올라가면 해수욕장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에메랄드빛 바다와 하얀 모래사장이 길게 이어진 모습이 마치 수채화 같다. 그 풍경을 가슴에 담고 천천히 내려와 다시 바다로 발걸음을 옮기면, 함덕의 매력이 더욱 가까이 느껴진다.
소나무 숲
해수욕장 중간에는 너른 그늘을 만들어주는 소나무 숲이 있다. 피서철에도 이 소나무 그늘 덕에 많은 사람들이 돗자리를 펴고 쉰다. 나무 아래 앉아 있으면, 바람이 솔잎 사이로 지나가는 소리가 파도 소리와 어우러져 작은 자연의 음악을 만든다. 나는 그 그늘 아래에서 아침에 챙겨 온 간단한 샌드위치를 먹고, 아이스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여름 한복판이지만, 땀이 나지 않을 만큼 선선한 공기. 그 여유로움이 참 좋았다.
점심 무렵엔 해변 앞 푸드트럭 거리로 향했다. 함덕해수욕장은 주변에 감성적인 카페와 트럭 음식점이 많기로도 유명하다. 갓 구운 핫도그, 수제버거, 한라봉 에이드, 심지어 푸짐한 해물라면까지. 나는 간단한 튀김 우동과 오징어 튀김을 사서 바다를 마주한 벤치에 앉았다. 평소라면 음식에 정신이 팔렸겠지만, 이날은 바다가 눈을 떼지 못하게 했다. 파도가 햇살을 튕겨내는 모습이 마치 유리 조각처럼 반짝였고, 그 위를 유유히 지나가는 카약이 한 폭의 풍경화처럼 보였다.
함덕은 그렇구 그런 해변? 아니다.
오후엔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오래도록 놀았다. 함덕해수욕장은 수심이 얕고 물살이 잔잔해 아이들뿐 아니라 수영을 잘 못하는 어른도 쉽게 들어갈 수 있다. 나도 무릎까지 들어가선, 해변에 누워 있는 기분으로 물결을 느꼈다. 멀리서 아이들이 튜브를 타고 파도에 몸을 맡기는 모습이 보였고, 연인들은 손을 잡고 물 위를 천천히 걷고 있었다. 함덕은 그런 해변이다. 활기가 있지만 소란스럽지 않고, 정적이지만 지루하지 않은 곳.
그리고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할 무렵, 함덕은 하루 중 가장 낭만적인 얼굴을 보여준다. 일몰 풍경이 다른 해변보다 아름답다고는 할 수 없지만, 함덕에선 해 질 무렵의 공기 자체가 다르다. 하늘은 분홍빛으로 물들고, 바다는 어둡고 깊어진다. 모래사장엔 그림자가 길게 드리우고, 사람들은 하나둘 조용히 자리를 정리한다. 하지만 나는 좀 더 그 자리에 머무르고 싶었다. 떠나기엔 너무 좋은 시간이었으니까.
함덕은 야경도 있다
해가 완전히 진 후, 함덕에는 야경을 즐기는 사람들이 모인다. 카페에 불이 하나둘 켜지고, 해변길을 따라 노란 조명이 켜진다. 바다 소리는 여전히 잔잔하고, 도란도란 웃음소리가 배경음처럼 흐른다. 나는 해변 옆 작은 카페에 들어가 따뜻한 라테를 한 잔 시켰다. 낮의 함덕이 선명한 초록과 파랑이었다면, 밤의 함덕은 잿빛과 은은한 노랑이었다. 전혀 다른 풍경인데도 둘 다 낭만적이었다.
함덕의 물결소리
그날 밤, 숙소로 돌아와도 함덕의 물결 소리가 귀에 남았다. 파도는 멀어졌지만 마음은 더 가까워졌달까. 그날 하루, 나는 에메랄드 바다에 발을 담그고, 햇살에 등을 맡기고, 바람을 친구처럼 느끼며 시간을 보냈다. 사람마다 기억에 남는 여름의 장면이 있다면, 내겐 함덕해수욕장의 그 고요하고 반짝이던 수면이 떠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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