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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파도보다 느긋한 하루, 곽지해수욕장에서 -휘준-

by 휘준쭌 2025. 8. 5.

 


곽지해수욕장을 처음 알게 된 건 몇 해 전, 우연히 협재해수욕장에서 조금 더 서쪽으로 달리다가였다. 바다를 따라 걷던 길 끝에서, 마치 감춰놓은 듯 고요한 해변이 하나 나타났다. 그곳이 곽지해변이었다. 이름도 낯설고, 풍경도 수수했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끌렸다. 그래서 이번 제주 여행에선 곽지를 가장 먼저 찾기로 했다. 바다에 덜 알려진 바다는 어쩐지 더 솔직한 풍경을 보여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곽지해수욕장은 제주시 애월읍 곽지리에 있다. 협재와 금능보다 조금 더 제주시 방향으로 가까운 위치. 차를 타고 애월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다 보면 어느 순간 푸른 바다 옆으로 모래사장이 펼쳐진다. 곽지는 협재처럼 북적이지도 않고, 중문처럼 격식을 차리지도 않는다. 대신 사람들의 말소리가 낮고, 파도는 조금 더 가까이에서 밀려온다.
 


도착한 시간은 오전 11시쯤. 해는 제법 뜨거웠고, 그늘은 아직 드물었다. 그래도 해변의 공기는 시원했다. 바람이 바다에서 밀려와 모래 위를 미끄러지듯 스쳤고, 나뭇잎도 파도처럼 흔들렸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샌들을 벗고 모래 위에 발을 얹었다. 곽지의 모래는 협재보다 조금 더 굵지만, 그 질감이 오히려 안정감을 줬다.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모래가 내 발을 꽉 잡아주는 기분이었다.
 


곽지해수욕장의 매력 중 하나는 해변과 연결된 담수욕장이다. 바닷가 옆으로 맑은 지하수가 솟아나는 작은 연못 같은 공간이 있다. 바다에서 놀다 몸을 헹구기에도 좋고, 더운 날엔 그곳 물에 발만 담가도 피로가 싹 가신다. 그 물이 얼마나 맑고 차가운지, 마치 냉장고에서 갓 꺼낸 생수처럼 느껴졌다. 아이들은 그곳에서 조그만 물고기를 쫓으며 놀았고, 어르신들은 다리를 담근 채 한참을 쉬고 계셨다. 바다와 담수의 조합은 제주에서도 흔치 않다. 그래서 곽지만의 풍경이 더욱 특별하게 느껴졌다.
 


해변은 비교적 단정한 형태를 하고 있다. 양쪽으로 현무암 절벽이 둥글게 감싸고 있어, 파도가 세게 밀려들지 않는다. 그래서 곽지는 아이를 동반한 가족들이 특히 좋아한다. 해수욕을 하기에 위험하지 않고, 파도도 잔잔하다. 물색은 맑은 청록빛으로,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다. 나는 수영복을 입지 않았지만, 발목까지 바닷물에 담그며 천천히 해변을 걸었다. 적당히 따뜻한 물, 부드러운 햇살, 물속을 유영하는 물고기. 그야말로 여름 한 페이지가 오롯이 펼쳐지는 풍경이었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해변의 여유였다. 사람은 적당히 있었지만, 누구도 시끄럽게 굴지 않았다. 파라솔 아래 책을 읽는 사람, 모래에 등을 대고 하늘을 보는 사람, 아이와 조용히 손잡고 걷는 사람. 곽지해변은 누군가의 목소리보다 각자의 여름을 더 선명히 들려주는 곳이었다.
 


점심은 해변 옆 작은 카페에서 해결했다. 제주 흑돼지 버거와 한라봉 에이드를 시켰다. 창가 자리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며 천천히 먹었다. 멀리서 파도 소리가 리듬처럼 들렸고, 음식은 생각보다 훨씬 맛있었다. 여름이 되면 종종 ‘이 여름은 대체 무슨 맛으로 남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곽지의 여름은 확실히 기억에 남는다. 바다 맛, 햇살 맛, 그리고 그 모든 걸 감싸는 평화의 맛.
 
오후엔 해변 끝자락으로 걸어갔다. 바위와 바위 사이로 작은 산책로가 있었고, 그 길을 따라가면 조금 높은 바다 전망대가 나온다. 그곳에서 내려다본 곽지해변은 아주 작고 단정했다. 사람들의 형체는 모래 위에 점처럼 찍혀 있었고, 바다는 수채화처럼 펼쳐져 있었다. 나무 그늘 아래 잠시 앉아 바다를 바라봤다.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다가, 이내 화면을 끄고 가만히 앉았다. 이 풍경은 찍는 것보다 그냥 바라보는 게 훨씬 좋았다.
 


해 질 무렵, 곽지의 바다는 또 한 번 얼굴을 바꾼다. 바다색은 짙은 청록에서 잿빛 푸름으로 변하고, 하늘은 주황과 보라가 어우러진다. 해변엔 길게 그림자가 생기고, 파도 소리도 낮고 깊어진다. 그 순간, 주변은 더 조용해진다. 누구도 먼저 일어나지 않는다. 마치 해가 완전히 질 때까지 이 아름다움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듯, 모두가 고요하게 그 순간을 누린다.
 


곽지해변을 나설 무렵, 나는 이미 마음속으로 곽지에 대한 애정을 키우고 있었다. 여름날의 바다는 언제나 특별하지만, 곽지는 유난히 ‘쉴 수 있게 해 주는’ 바다였다. 과장도, 과속도 없는 풍경. 그저 조용히 내 곁을 지켜주는 친구 같은 곳. 다음 제주 여행에도 곽지를 꼭 다시 올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익숙한 해변보다도, 나를 다시 나답게 만들어주는 그 장소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