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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메밀꽃 피기 전, 여름을 먼저 건너는 법 -휘준-

by 휘준쭌 2025. 8. 4.

평창 봉평 여행기

가을 꽃 메밀꽃
봉평 메밀꽃밭


메밀꽃은 가을에 핀다고들 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봉평을 9월쯤 찾아간다. 하지만 나는 조금 성급하다. 가을까지 기다리기엔 여름이 너무 길고 덥다. 그리고 무엇보다 봉평에는, 꽃이 없어도 시원하게 피어나는 무언가가 있다. 그 이름은 바로, 흥정계곡. 이곳은 더위에 지친 영혼들이 물속에서 다시 환생하는 장소다. 나는 올해 그 대열에 합류하기 위해 봉평행 버스에 올랐다. 목적지는 메밀꽃이 아닌, 계곡과 물소리였다.

 

평창이라는 지명은 어딘지 모르게 서늘한 느낌을 준다. ‘평’ 자도 시원하고, ‘창’ 자도 바람을 몰고 오는 느낌이다. 그리고 실제로 봉평에 도착하자마자, 피부로 느껴지는 기온이 달랐다. 도심의 공기가 눅눅한 찜질방 같다면, 여기는 냉장고를 살짝 열었을 때 나오는 ‘그 바람’과 비슷하다. 에어컨이 필요 없는 동네란 이런 곳이구나 싶다.

 

흥정계곡은 소리부터 다르다. 도시에서 들리는 물소리는 대부분 인공폭포나 정수기 소리지만, 여기는 다르다. 자연 그대로, ‘졸졸’보다는 ‘쏴아’에 가까운 물소리가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들려온다. 그 물소리는 세탁기처럼 내 마음을 헹구고, 미세한 스트레스까지 말끔히 빨아낸다. 그리고 발을 담그는 순간, 다리에 감전이라도 된 듯 전기가 찌릿! 물론 감전은 아니고, ‘이게 진짜 차가운 물’이라는 정직한 충격이다.

메밀꽃밭
메밀꽃밭

 

나는 신발을 벗고, 바지를 걷고, 과감히 돌 위에 앉았다. 물은 무릎 아래까지 차오르지도 않았지만, 그 짧은 깊이 안에 여름은 완전히 사라졌다. 몸이 적시는 물보다, 마음이 먼저 젖었다. 물은 물인데, 희한하게 감정까지 씻겨 내려가는 느낌. 사람들이 여름이면 바다보다 계곡을 찾는 이유가 뭘까 싶었는데, 이제야 알겠다. 바다는 웅장하지만, 계곡은 다정하다. 바다는 인생을 돌아보게 만들고, 계곡은 오늘 하루를 살게 만든다.

 

물놀이를 마치고 배가 출출해지면, 봉평 읍내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엔 우리가 아는 ‘메밀’이 기다린다. 흔히 생각하는 메밀국수도 좋지만, 여기서는 ‘메밀전병’과 ‘막국수’가 주인공이다. 전병 안에는 묵직한 무나물이 꽉 찼고, 막국수는 새콤한 양념과 함께 고명으로 삶은 감자가 올라가 있다.

소반 메밀
소반 메밀


여름날, 입맛이 없다고 푸념하던 이도 이걸 먹고 나면 “더 시켰어야 했나…” 고민하게 된다. 음식이란, 기운을 북돋는 가장 맛있는 마법이다. 식사를 마치고 슬슬 걷기 좋은 시간엔 이효석 문학관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문학관이라 해서 딱딱하고 졸음 부르는 공간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곳은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속 이야기를 공간에 그대로 풀어놓은 듯한 곳이다. 옛 사진들, 원고지, 필사본, 그리고 한쪽 벽에 흐르는 나지막한 목소리의 낭독. 잠시 앉아 낭독을 듣고 있자면, 이 여름이 아니라 가을밤 어딘가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거기 앉아 “달빛 아래 핀 메밀꽃밭”을 상상해 보면, 여름도 그리 고약하지 않은 계절로 느껴진다.

 

그리고 이건 개인적인 팁이지만, 문학관 옆에 있는 작은 메밀밭은 사진 찍기 좋은 포인트다. 물론 지금은 꽃이 만발한 시기는 아니지만, 초록의 잎과 하늘의 대비만으로도 충분히 멋지다. 게다가 인파가 많지 않아 눈치 보지 않고 셀카 삼매경에 빠질 수 있다. SNS에 올릴 때는 해시태그로 이렇게 붙이자.


#꽃은없지만풍경은있다 #봉평은여름에도예쁘다 #흥정계곡핵시원

봉평 여행은 요란하지 않다. 눈부신 바다도 없고, 대형 놀이공원도 없다. 대신 다정한 계곡과 조용한 밥상, 낭만적인 문학의 흔적이 있다. 여름을 굳이 소란스럽게 보내고 싶지 않은 이들에게 봉평은 딱 좋은 위로다. 짧게 다녀와도, 긴 여행처럼 여운이 남는다. 나는 돌아오는 길, 다짐 하나를 했다.


가을에 다시 올 거라고.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필 무렵에, 다시 이 길을 걷고 싶다고. 하지만 동시에 생각했다. 여름에 이곳을 만난 것도 꽤 괜찮은 행운이었다고. 메밀꽃보다 더 반짝였던 건, 찰랑이는 물살 위로 내 발끝이 웃던 그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