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재해수욕장을 걷다 보면, 어느 순간 모래사장이 살짝 넓어지고 바닷물이 더 잔잔해진다. 그리고 사람들의 말소리도 조금은 줄어든다. 바로 그 지점이 금능해수욕장이다. 협재와 금능, 두 해수욕장은 실은 울타리 하나 없이 연결되어 있지만, 기분은 사뭇 다르다. 형제 같은 두 바다, 그중에서도 나는 금능에서 마음이 잔잔해진다.
어느 여름날, 협재해변에서 반나절쯤 시간을 보내고 난 뒤였다. 햇살이 조금 누그러지고, 파라솔 아래 책을 덮은 뒤 자리에서 일어나 해안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바닷물은 여전히 맑고, 모래는 발에 착 붙었다. 몇 걸음 옮기니 협재의 활기찬 분위기가 서서히 멀어졌고, 대신 더 조용하고 여유로운 공기가 몸을 감쌌다. 해변이 넓어지고, 파도 소리가 낮아진 곳. 그곳이 금능해수욕장이었다.
금능은 협재보다 사람의 밀도가 적다. 조금 더 한적하고, 조금 더 느긋하다. 같은 바다인데도 분위기가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니, 바다도 성격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협재가 생기 넘치는 첫째라면, 금능은 묵묵히 곁을 지키는 둘째 같다. 말은 적지만 정이 깊고, 묵직한 위로를 건네는 사람. 나는 그런 금능이 좋았다.
무엇보다 금능은 비양도와 가장 가까운 해변이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거리. 해 질 무렵이면 그 비양도 뒤편으로 해가 떨어지는데, 노을이 바다를 붉게 물들이고, 그 너머의 섬이 실루엣처럼 떠오른다. 말없이 그 장면을 바라보면, 사람은 저절로 고요해진다. 사진으로 찍으면 아깝고, 그저 눈에 담고 싶은 순간. 나도 모르게 숨을 멈추고 바라보게 되는 그런 풍경이다.
금능해수욕장의 모래사장은 유난히 깨끗하다. 마을 주민들과 자원봉사자들이 수시로 정비해주는 덕분이라고 들었다. 발밑엔 조개껍데기나 해초 하나 보기 힘들 만큼 단정한 모래길이 이어진다. 어린아이들이 맨발로 뛰놀기에도 안심이 되고, 어르신들도 산책 삼아 걷기 좋다. 실제로 나는 그날, 할머니 한 분이 바다 쪽을 바라보며 나무의자에 앉아 계신 모습을 오래도록 기억한다. 손엔 아이스커피가 들려 있었고, 표정은 평온 그 자체였다.
금능해변엔 작지만 감성적인 카페와 식당이 몇 군데 있다. 해변 바로 옆엔 루프탑이 있는 카페도 있는데, 그곳에서 바라보는 일몰은 협재보다 금능 쪽이 훨씬 더 근사하다고 누군가는 말했다. 나도 그 말을 믿게 되었다. 해가 수평선에 거의 닿을 무렵, 나는 그 루프탑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따뜻한 공기, 천천히 변하는 빛, 잔잔한 파도, 그리고 테이블 위에 놓인 시간. 그 순간만큼은 제주라는 이름을 품은 여름이 나를 위해 준비해 놓은 선물 같았다.
협재해수욕장과 금능해수욕장은 연결되어 있지만, 방문객의 목적은 조금 다르다. 협재는 놀기 좋은 해변이다. 튜브와 패들보드, 물놀이와 활기가 있는 곳. 반면 금능은 걷고 머물기 좋은 해변이다. 이야기를 나누고, 생각을 정리하고, 고요함을 만끽하는 공간. 그래서 나는 둘 중 하나를 고르기보다, 두 해변을 함께 걷는 시간을 추천하고 싶다. 그건 마치 활기와 평온, 두 감정을 동시에 품는 산책 같다.
하루 여행을 계획한다면 이렇게 추천한다. 오전엔 협재에서 수영을 하고, 점심은 근처의 해산물 식당이나 푸드트럭에서 해결한다. 그리고 오후 3시쯤, 해가 약해질 무렵부터 금능 쪽으로 천천히 걸어간다. 중간엔 바다를 따라 걷는 작은 산책길도 있고, 나무 그늘 아래 앉을 벤치도 있다. 그렇게 걷다 보면, 어느새 마음도 부드럽게 풀린다.
특히 해질 무렵의 금능은, 제주 바다의 감성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시간이다. 해수욕장은 조용해지고, 바다는 바람에 반짝인다. 멀리 비양도는 점점 그림자처럼 변하고, 모래사장엔 긴 그림자가 하나씩 늘어선다. 나도 그 중 하나의 그림자가 되어, 조용히 하루를 마무리했다.
돌아오는 길, 나는 다시 협재를 거쳐 나왔다. 금능에서 시작된 고요함이 아직도 내 안에 머물러 있었고, 여운이 길었다. 두 바다는 서로 닿아 있지만, 각자의 결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 결들 사이에서 나도 모르게 위로받았다. 한쪽은 나를 웃게 하고, 한쪽은 나를 쉬게 했다.
협재와 금능, 두 해변을 천천히 걸으며 나는 여름을 한 겹 덧입었다. 굳이 멀리 가지 않아도 좋았다. 그저 그 해변에 발을 담그고, 하늘을 바라보고, 바람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바다는 그렇게, 내게 또 하나의 여름을 선물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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