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여름은 어딘가로 가고 싶으면서도, 그 어딘가가 너무 멀지 않았으면 좋겠고, 또 너무 유명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그러면서도 사진은 예쁘게 나왔으면 좋겠고, 그러면서도 덜 더웠으면 좋겠다는 욕심 많은 마음이 슬그머니 올라왔다.
욕심은 욕심일 뿐이라고 누군가는 말했지만, 나는 그런 바람이 모여 만든 장소를 알고 있다. 전남 담양, 바람의 통로라 불릴 만한 그곳. 이름만 들어도 초록빛이 솟아오르는 그곳, 죽녹원과 메타세쿼이아길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처음에 대나무숲이 무슨 재미일까 싶었다. 나무는 나무고, 그늘은 그늘이지, 대나무가 만든 그늘이라고 특별할 게 있을까? 그런데 막상 발을 들이고 나니, 이건 그냥 ‘그늘’이 아니었다.
죽녹원의 바람은 바람 자체로 살아 있는 것 같았다. 그냥 지나가는 게 아니라, 귓불을 살짝 간지럽히며 말을 걸고, 목덜미에 와서는 “덥지? 내가 좀 식혀줄게”라며 부채질을 하는 듯했다. 대나무들이 서로 몸을 부딪치는 소리는 바람의 박수소리 같았고, 그 박수는 나를 위한 축하 공연처럼 들렸다.
산책길을 걷다 보면, 어느 순간 발걸음이 느려진다. 덥지 않아서가 아니라, 걷는 그 자체가 좋기 때문이다. 대나무들이 일렬로 서 있는 풍경은 마치 누군가가 ‘초록’이라는 색깔을 정성껏 정렬해 놓은 것 같았고, 초록빛 사이를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잠시 시인이 된다.
“어쩌면 이 길의 끝엔, 정말 내가 찾던 마음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 그렇게 괜한 철학이 몽글몽글 떠오를 때쯤,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죽녹원을 지나 나오면 담양의 또 다른 상징, 메타세쿼이아길이 등장한다. 정렬의 미학이란 이런 걸까. 곧게 뻗은 나무들이 양 옆으로 늘어서 있고, 그 가운데를 걷는 사람은 마치 그림책 속 주인공처럼 느껴진다.
여기는 특히 ‘멍 때리기 좋은 길’이다. 핸드폰을 내려놓고, 생각도 잠시 내려놓고, 그냥 걷기만 해도 된다. 걷다 보면 바닥에 나뒹구는 솔방울 하나에도 감탄하게 되고, 지나가는 아이의 웃음소리에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이 길에선 꼭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된다. 있는 그대로의 내가 충분하다는 걸 이 나무들이 알려준다. 나무가 나무인 걸로 충분한 것처럼, 사람도 그냥 사람인 걸로 충분하다는 것을.
물론 여행에는 입이 즐거운 시간도 빠질 수 없다. 담양에 왔으면 무조건 ‘떡갈비’ 아니겠는가. “떡갈비 먹으러 담양 간다”는 말이 농담처럼 들릴지 몰라도, 실제로는 꽤 많은 이들이 그 마음으로 향한다.
숯불에서 지글지글 익어가는 떡갈비는 고기의 품격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육즙은 겸손하게 입 안에 퍼지고, 고소함은 은은하게 머리를 두드린다. 여기에 대통밥이 빠질 수 없다. 대나무통에 찹쌀과 잡곡, 밤, 대추를 넣고 쪄낸 밥은 한 입 먹는 순간 ‘여행 오길 잘했다’는 감탄을 부른다.
밥 한 숟가락에 대나무 향이 스며든다니, 이건 그냥 식사라기보다는 대나무와의 교감에 가깝다. 게다가 먹고 나면 건강해진 기분까지 덤이다. 삼계탕 안 먹어도 여름이 거뜬할 것 같은 착각… 아니 자신감이 생긴다.
식사 후에는 근처 카페에 들러 수국 핀 뜰을 바라보며 시원한 커피 한 잔을 마시는 것도 좋다. 요즘 담양엔 감성 충만한 카페들이 꽤 많다. 그중 몇 군데는 마치 식물도감 속에 들어간 듯한 분위기를 자랑하는데, 에어컨보다 선풍기 바람과 나뭇잎 소리가 더 잘 어울리는 공간들이다.
이런 카페에선 노트북도 꺼내지 말고, 그냥 물끄러미 창밖만 보자.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하고 말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순간, 시간은 정말 살짝 멈춰주는지도 모른다.
돌아오는 길, 나는 문득 생각했다. 이 여름, 우리는 더위를 피하기 위해 떠난다기보다, 내 안의 뜨거운 마음을 잠시 식히기 위해 떠나는 것 아닐까.
담양은 그 마음을 식혀주는 곳이다. 부채질하는 바람, 말없이 품어주는 초록, 나를 위한 한 끼, 그리고 멍 때려도 되는 거리.
모두가 나를 위해 준비된 듯한 이 여름날의 조합. 그 덕분에, 나는 이 계절을 조금 더 사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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