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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 자작나무 숲에서 스미는 마음 : 인제 여행기 -휘준-

by 휘준쭌 2025. 7. 5.

 

자작나무숲
자작나무숲

 

자작나무 숲에 다녀왔다고 하면 사람들은 대개 겨울을 떠올린다. 눈 쌓인 숲, 하얀 나무껍질, 그 사이로 빨간 패딩 입은 사람이 걷는 풍경. 사진첩에서 자주 보는 장면이다. 하지만 나는 한여름, 그것도 햇살이 강하게 쏟아지는 7월에 그 숲을 찾았다. 누군가 말하길, 여름의 자작나무는 겨울보다 덜 화려하지만, 훨씬 더 따뜻하고 조용한 시간을 준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정말이었다. 여름의 자작나무 숲은 녹음 속에 숨어 있는 작은 평화였고, 초록의 파도에 안긴 흰 줄기의 조화는 그 어떤 계절보다도 풍요로웠다.

 

강원도 인제읍 원대리. 서울에서 두 시간 반쯤 달리면 만나는 이 마을은, 지도상으로는 가까워도 마음속으로 다가가기까지 시간이 좀 걸린다. 도로를 벗어나 좁고 굽이진 길로 접어들수록 신호는 흐려지고, 소음도 줄어든다. 길가에 핀 야생화들과 간간이 등장하는 시골집들이 도시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음을 알려준다. 자작나무 숲 입구에 다다르면, 세상의 목소리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새소리와 바람 소리만이 귀를 채운다. 거기서부터가 진짜 여행이다. 나를 비우고 자연을 받아들이는 시간.

 

입구에서부터 탐방로가 이어진다. 경사가 완만해 누구나 걷기 좋지만, 묘하게 숨이 고요해지는 길이다. 나무 계단을 오르며 나는 자꾸만 주변을 둘러보게 된다. 키 큰 활엽수들이 하늘을 가리고, 바람은 나뭇잎을 흔들며 인사를 건넨다. 가방 속 핸드폰은 신호도 없고 알림도 없다. 눈앞의 풍경과 발밑의 흙길만이 전부다. 그렇게 30~40분쯤 걷다 보면 어느 순간 풍경이 확 바뀐다. 수직으로 쭉 뻗은 흰 자작나무들이 질서 정연하게 도열한 장면. 마치 숲이 나에게 환영 인사를 하는 듯했다. 바로 그곳이 사람들이 말하는 ‘포토존’이다.

 

빛이 좋은 시간에 맞춰 도착했는지, 숲속엔 사선으로 떨어지는 햇살이 초록 이파리 사이를 뚫고 자작나무 줄기에 부딪혔다.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린 나무들 사이로 사람들이 삼각대를 세우고 셀카봉을 들었다. 누구는 나무에 등을 기대고 책을 읽었고, 또 누구는 조용히 앉아 풍경을 그렸다. 나는 카메라를 꺼내 한참을 고민했다. 어떤 장면을 찍어야 가장 이곳의 분위기를 담을 수 있을까?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자작나무 숲은 ‘찍는 대상’이 아니라, ‘머무는 장소’라는 걸.

 

나는 나무 하나에 등을 기대고 그냥 숨을 쉬었다. 내쉴 때마다 푸른 공기가 폐를 적셨고, 나뭇잎들이 흔들리는 소리는 마치 누군가 내게 속삭이듯 부드러웠다. 사진은 잠시 접어두고 귀를 열었다. 쨍한 여름에도 이 숲은 시원했고, 뜨거운 햇살에도 이곳의 공기는 부드러웠다. 자작나무 숲이 주는 진짜 선물은 시원한 그늘이나 멋진 사진이 아니라, 말이 줄어드는 시간이다. 침묵은 늘 불편했는데, 이 숲에서는 오히려 안심이 됐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 그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쉴 수 있었다.

 

길 중간중간 쉼터가 있었고, 벤치에 앉아 물을 마셨다. 땀을 식히는 바람이 지나갔고, 뺨 위로 햇살이 간지럽게 내려앉았다. 길게 숨을 내쉬며 하늘을 봤다. 파랗고 투명했다. 도심 속 높은 건물과 에어컨 아래에서 느끼지 못했던 하늘, 여기는 참 가까웠다. 그 순간 내 머릿속을 복잡하게 했던 일들은 조금씩 멀어졌다. 시끄러운 일정표와 사람들의 말, 늘어나는 알림 창, 밀린 답장들. 자작나무 숲은 내 안에 산만하게 떠다니던 것들을 가라앉히는 커다란 저수지 같았다.

 

걷는 내내, 문득문득 나를 돌아보게 되는 순간이 있었다. 도시에서는 걷기보다 이동이 먼저였고, 속도가 기준이었지만 이곳에서는 정지가 허락됐다. 자꾸만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게 되고, 길 옆의 풀 한 포기도 들여다보게 된다. 자작나무 한 그루, 그 앞에 선 나, 그리고 셔터를 누른 그 순간. 그건 풍경이 아니라 나를 담는 일이었다. 내 마음이 그날 어떤 결을 지녔는지, 어떤 온도로 세상을 보고 있었는지를 기록하는 장면이었다. 그렇게 자작나무 숲은 내게 사진보다 선명한 감정을 남겨주었다.

 

숲을 내려오는 길엔 어쩐지 발걸음이 가벼웠다. 땀이 식으며 살갗에 바람이 닿았고, 마음도 어딘가 가벼워졌다. 차에 타서도 한참을 그 숲을 떠올렸다. 옷엔 여전히 풀냄새가 배어 있었고, 카메라엔 내 표정이 담겨 있었다. 평소엔 잘 웃지 않던 내가, 자작나무 숲에서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런 나를 보며 깨달았다. 사람은 결국 자연 앞에서 가장 자기답게 웃는다는 걸.

 

언젠가 다시 그 숲을 찾고 싶다. 계절을 바꿔도 좋고, 기분을 달리해도 좋겠다. 다만, 그날처럼 아무 기대 없이 들어서고, 조용히 나오는 걸로. 그리고 마음에 무언가 하나쯤 더 얹혀 나올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자작나무 숲은 그렇게, 말없이 나를 받아주는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