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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소금꽃과 전나무 길 : 부안에서 찍고 쉰 하루 -휘준-

by 휘준쭌 2025. 7. 8.

안개에 묻힌 전북
안개에 덮힌 전북

 

부안은 내가 별생각 없이 떠났다가, 별생각이 많아져서 돌아온 동네다. 처음엔 그저 ‘사진 잘 나오는 절’과 ‘염전’ 정도로 알고 갔다. 내소사 전나무 숲길은 인스타 감성 맛집이고, 곰소염전은 석양 명소라고 하니, 사진 한 장쯤은 건질 수 있겠지 싶었다. 그런데 그 하루가 나를 흔들 줄이야. 어디선가 묵은 숨을 푹 내쉬게 만들고, 오래된 나무와 바람, 소금기 어린 햇살이 같이 앉아서 속삭이던 풍경들. 카메라보다 마음을 들이댄 날이었다.

 

서울에서 새벽같이 출발해 부안으로 향했다. 전북 끝자락, 곰소항 근처의 정겨운 바다 마을. 도착한 시간은 오전 9시 반. 아직 햇빛은 부드럽고, 숲길은 조용했다. 내소사 입구에 차를 세우고 내려보니, 사람보다 새소리가 먼저 반겼다. 걷자마자 “아, 이래서 오는구나” 싶었다. 고요한 숲길이 쭉 뻗어 있고, 양 옆으로 전나무들이 키를 맞춰 도열해 있다. 600m 남짓한 그 길은 짧지만, 마음으론 훨씬 길다. 걸음을 멈추게 만드는 구간이 너무 많아서다. 전나무 하나하나가 살아 있는 듯한 기운을 뿜어냈고, 그 그늘은 도심의 그 어떤 쉼터보다도 편안했다.

 

전나무들은 참 착하게 생겼다. 위로만 쭉쭉 뻗은 곧은 몸, 푸르게 빽빽한 가지, 어디에 기대지도 않고 서 있는 자세가 단정하고도 단호하다. 나는 걷는 중에도 자꾸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햇살이 잎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나무 사이사이로 투명한 금실처럼 떨어진다. 그 아래 서면, 꼭 내가 무슨 자연 다큐멘터리에 나온 인물 같았다. 셀카를 찍으려다 말고, 그냥 눈으로 담았다. 그게 더 오래가니까. 사진은 금방 지워지지만, 마음에 남은 풍경은 계절이 바뀌어도 그대로다.

 

내소사 대웅보전 앞에 다다르자 묘하게 울컥했다. 조용한 절집 하나가 전나무 숲 끝에 붙어 있었는데, 세월이 흐른 흔적이 지붕과 벽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화려하지 않지만 깊고, 정갈하지만 따뜻했다. 마루 끝에 앉아 숨을 골랐다. 도시에서는 늘 누군가를 피해 구석을 찾는데, 여긴 그런 구석이 다 나를 향해 열려 있었다. 쉴 틈을 주는 공간, 그게 절이었다.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먼 풍경을 바라보다 보니 어느새 시간도, 근심도 멈춰 있었다.

 

절을 나서 점심은 곰소항 근처에서 먹었다. 소금으로 간한 젓갈과 시원한 백합탕, 구수한 밥 한 공기. 염전에서 난 소금이 밥상까지 연결된다는 걸 실감했다. 염전을 보기 전부터 이미 짭조름한 감탄이 배어 있었다. 음식은 단순했지만 재료가 솔직했고, 입 안에서 퍼지는 풍미는 오랜 손맛과 바닷바람이 어우러진 결과였다. 밥을 먹으며 창밖으로 보이는 항구의 풍경까지 한 접시에 담긴 느낌이었다.

 

오후가 되니 햇살이 강해졌다. 곰소염전으로 향했다. 멀리서 볼 땐 그냥 바닥에 물을 뿌린 것처럼 평평하고 밋밋해 보였는데, 가까이 가보니 그건 ‘거울’이었다. 하늘과 구름, 산과 사람까지 그대로 담아내는 거대한 반사판. 염전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낭만적일 줄은 몰랐다. 더운 날씨에도 이곳은 어딘지 모르게 느긋했다. 땀을 흘려도 짜증이 나지 않고, 햇빛이 따가워도 마음이 부드러워졌다.

 

염부 한 분이 소금삽을 들고 흰 결정들을 모으고 계셨다. 햇살이 바닥을 때릴수록, 수면 위엔 반짝이는 별들이 깔렸다. 바람은 염분을 품고 있어서, 얼굴에 닿는 느낌이 짜면서 시원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사진이 됐다. 특히 석양 무렵, 태양이 낮게 내려앉고 물빛이 붉게 물들기 시작하면, 염전 전체가 붉은 리본처럼 펼쳐진다. 그 위로 실루엣이 된 사람들, 소금더미, 그리고 새떼들이 지나간다. 그 풍경은 ‘찰칵’이 아니라 ‘하…’였다. 숨이 나가는 풍경. 사진 한 장을 찍기 위해 왔다가, 말을 잃는 순간을 얻었다. 누군가와 함께였다면 조용히 손을 잡았을 것 같았다.

 

염전 옆 작은 벤치에 앉아 노을을 보았다. 그늘도 없는데 이상하게 시원했다. 염전의 온도는 낮보다, 마음이 낮아질수록 더 시원해지는 듯했다. 물결도 없고, 소음도 없고, 그저 찰랑거리는 빛과 짭짤한 바람, 먼 곳의 갈매기 울음만 들렸다. 여행이란 참 신기하다. 어디를 가느냐보다, 어떤 상태로 걷느냐에 따라 똑같은 풍경도 전혀 다르게 느껴지니까. 이 날의 나는, 오래 묵힌 감정 하나를 내려놓은 듯했다. 벤치에 앉아 한참을 있었는데도, 지루하지 않았다. 시간이 멈춘 듯한 평화.

 

돌아오는 길, 카메라엔 사진이 그득했고, 마음엔 여백이 그득했다. 사실 요즘 사진은 핸드폰으로도 잘 나오고, 보정 앱도 끝내주게 잘 돼 있다. 그런데 내소사 전나무 숲길과 곰소염전은 그 어떤 보정도 필요 없는 장면들이었다. 오히려 나를 보정해 주는 곳. 말을 덜고, 마음을 낮추고, 속도를 천천히 만들며 나를 ‘초기화’시키는 곳. 사진보다 더 선명한 건 그곳에서의 감정이고, 풍경보다 더 짙은 건 그때의 공기였다.

 

부안은 그렇게, ‘그림 찍으러 갔다가 마음 찍히고 오는’ 여행지였다. 혹시라도 일상이 지겹고, 기분이 무거우며,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날이 있다면 그땐 부안으로 떠나보시길. 전나무 길 한복판에서, 혹은 염전의 붉은 수면 앞에서 나도 몰랐던 내 표정이 조용히 떠오를 것이다. 그 표정은 거울보다 정확하게 지금의 나를 말해준다. 그래서 그곳은 한 번쯤, 꼭 혼자 가도 좋은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