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5.31.)
===={제 18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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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두 번, '현충일'과 '국군의 날'이 가까워 올 무렵이면 서울 동작동의 국립현충원에 갑니다.
관세청 퇴직공무원들의 모임인 <관우봉사단>의 일원으로서 현충일과 국군의 날 전에 호국 영령들의 묘역을 돌보기 위해서이지요. 현충일을 열흘 앞둔 지난 화요일에도 관우봉사단과 국세동우회 회원 30여 명이 담당 구역 전사자 묘역에서 태극기와 조화를 갈아 드렸습니다. 작년 국군의 날 전에 꽂아 드렸던 것들이지요.
어렵다거나 힘든 일은 아니지만, 조국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신 호국 영령들의 묘역을 돌보아 드리는 것은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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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 작업을 하면서 묘역을 돌아볼 때마다 아프게 느끼는 것은 영현들의 순국 연령이 무척 낮아 보인다는 점입니다.
일등병이나 이등병으로, 대부분 전쟁 초기인 1950년 후반에 산화한 분들이라는 데서 아픔이 크게 느껴지는 것이지요.
창군(創軍)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전열이나 장비를 제대로 갖출 수 없었던 상황 속에서 인생의 꽃을 제대로 피워보지 못한 채 무참히 꺾였다는 것은 그 자체가 슬픔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병사 한 명의 죽음은 비극이요, 백만 명의 죽음은 통계다."라고 한 독일 작가 '에리히 M. 레마르크'의 말처럼, 현충원에 잠든 한 분 한 분이 지닌 사연들은 그 자체가 비극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것은 '애국'이라든지 '호국'이라든지 하는 것과 또 다른 차원의 인간적인 아픔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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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인간에게 주는 가장 큰 해악은 수많은 인간들, 그중에서도 이제 새로운 희망을 안고 인생을 시작하려는 젊은이들의 생명을 무참히 앗아간다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은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어른들이 일으킨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소중한 생명을 잃는 것이지요.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에서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학생들이 학업을 중단하고 군에 입대합니다. 담임교사의 부추김에 따른 것이었지요. 군에 입대한 학생들은 하나, 둘 목숨을 잃게 되는데, 전선의 병사들의 목숨은 소모품 정도로 여겨져, 한, 두 명의 죽음은 그저 미미한 통계자료에 불과할 뿐입니다.
"여기까지 써 내려온 '파울 보이머'군도 마침내 1918년 10월 어느 날 전사했다. 그날은 온 전선에 걸쳐 극히 평온하고 조용했다. 그래서 사령부 보고서에는 '서부전선 이상 없음, 보고할 사항 없음.'이라는 문구가 적혔을 뿐이다."
소설 <서부 전선 이상 없다>의 마지막처럼, 전선에서의 한 명의 젊은 병사의 죽음은 상부에 보고거리도 될 수 없었던 것이지요. 주인공 자신에게는 온 우주가 막을 내리는 중대한 사건인데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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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모윤숙은 친일 문학가로 잘 알려진 사람입니다.
독일 파시스트 정권을 위해 자신의 제자들을 전선으로 내몰았던 위 소설 속의 고등학교 담임처럼, 모윤숙도 젊은이들을 일제 군국주의자들이 일으킨 대동아 전쟁에 내몰기 위해 선동적인 글을 남발했던 사람이지요.
"눈은 하늘을 쏘고 그 가슴은 탄환을 물리쳐/ 대동양(大東洋)의 큰 이상 두 팔 안에 꽉 품고/ 달리어 큰 숨 뿜는 정의의 용사/ 그대들은 이 땅의 광명입니다. 대화혼(大和魂) 억센 앞날 영겁으로 빛내일/ 그대들 이 나라의 앞잡이 길손/ 피와 살 아낌없이 내어 바칠/ 반도의 남아 희망의 화관(花冠)입니다"
일제 말,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다달아 패망에 이른 일제가 조선의 청년들을 마구잡이로 징집할 때, 자발적인 지원을 선동하며 쓴 모윤숙의 시 <지원병에게>입니다.
일제의 승리를 위해 한 가닥 양심의 거리낌 없이 젊은이들을 전장에 내몰았던 사람이, 해방 후 터진 6.25 전쟁에서 산화한 젊은이들을 추념하며 쓴 시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는 그런 점에서 사고(思考)의 큰 혼란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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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6,70년대에 유행했던 팝송들 중 미국 여가수 '조앤 바에즈'가 부른 <도나도나>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는 아무런 명분 없이 베트남전에 징집되어 죽거나 다치는 미국의 젊은이들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반전(反戰) 노래이지요.
"시장을 향해 가는 마차 위/ 슬픈 눈의 송아지 한 마리/ 그 위 하늘 높이/ 빠르게 날아가는 제비 한 마리
'불평 말렴' 농부가 말했지/ '누가 송아지로 태어나라든?/ 왜 넌 날아갈 날개가 없니/ 저 자랑스럽고 자유로운 제비처럼?'
송아지는 던져져 죽임을 당했네/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하지만 그 누가 자유를 지니나/ 날아가는 법 배운 저 제비처럼."
영문도 모른 채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슬픈 눈의 송아지는, 원래 홀로코스트 당하기 위해 아우슈비츠의 수용소로 끌려가던 유태인들을 상징했지만, 베트남 전에 징집되어 죽어가는 병사들을 가리키는 의미가 훨씬 더 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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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원 정화 작업을 하면서 전쟁 이야기를 길게 쓴 것은, 공산 침략자들로부터 조국의 자유를 지켜주기 위해 젊은 목숨을 바치신 호국 영령들을 기억하고, 거룩한 넋을 추모하기 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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