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에겐 육십이 넘도록 언제나 가슴속에 남아있는 돈이 있습니다.
그건 2원, 초등학교 2학년 때 공책 값입니다. 공책을 산다며 타온 돈을 만지작거리던 저는 문방구점을 그냥 지나쳤습니다. 갑자기 엄마가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엄마는 배가 아프다며 자주 입원을 하셨는데, 어느 계절엔 집보다 병원에 계신 날이 더 많았습니다. 저는 엄마 없는 집이 몹시 싫었습니다.
학교가 파한 뒤 상도동에서 전찻길이 있는 노량진까지는 한 시간쯤 걸었습니다. 노량진에서 2원에 전차표를 사서 탔고 남영동에서 내렸습니다. 그러나 갈아탈 차비가 없어서 효자동 가는 전차를 몇 대나 보냈습니다. 한 길 복판에 서서 '내가 어쩌자고 돈도 없이 여길 왔을까?' 후회했지만 엄마를 보고 싶은 마음은 모든 걸 이기게 했습니다.
눈치 보며 망설이다 한복 입은 아줌마의 치마 끝을 슬쩍 붙들고 올라탔습니다. 차장아저씨는 뭔가 물어보려다 말았고 2학년 꼬마는 마구 뛰는 가슴을 안고 아줌마 옆에 착 붙어 서있었습니다. 아들이 아닌 게 탄로 날까 봐 그랬습니다. 가장 큰 걱정은 아줌마가 먼저 내리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줌마와 눈이 마주쳤을 때 가만히 여쭈었습니다.
"아줌마, 어디까지 가세요?"
차장아저씨는 엄마와 다정한 대화쯤으로 아셨을 겁니다.
"효자동 가는 데 왜 그러니?"
아줌마의 대답이 너무 좋아서 치마를 다시 잡을 뻔했습니다.
어엿이 책가방을 멘 학생이었는데 왜 혼자 타면 차표를 내야 하고 어른과 같이 타면 공짜였는지는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상도동에서 효자동까지 2학년 꼬마에게는 먼 길이었습니다. 청와대 길에서 순화병원까지 시장도 지나고 골목도 지나는 그 길은 딱 한번 아버지를 따라가 본 길입니다. 하얀 건물 2층 복도를 지나며 방마다 두근두근 살폈습니다. 맨 끝 병실 하얀 침대 위에 엄마가 앉아계셨습니다.
"엄마-"
엄마는 깜짝 놀라 눈이 동그래졌고 나는 강아지처럼 뛰어가 안겼습니다. 그러나 이내 야단을 맞았습니다. 책가방을 멘 폼이 집에도 안 들른 모습이고 왕복차비도 없이 먼 길을 나선 잘못을 매섭게 꾸짖으셨습니다. 전화도 없던 시절에 집은 없어진 아이로 발칵 뒤집힐 게 뻔했지만 엄마는 길을 잃을까 봐 혼자 돌려보낼 수도 없었겠죠.
제 머리를 쓰다듬으며 많은 얘기를 해주셨습니다. 모처럼 엄마 옆에서 숙제도 하고 복도도 뛰어다니며 놀았습니다. 그러다 하얀 침대에서 까무룩 잠이 들었습니다. 잠에서 깨면 엄마가 있었고 또 자다 깨어도 엄마가 있었습니다. 창밖이 깜깜해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어느새 이슥해진 밤에 남루한 아버지가 오셨습니다. 목수 일을 하시던 아버지는 깜짝 놀라 일어난 아이의 엉덩이를 마구 때렸습니다. 그리곤 돌아서서 우셨고 엄마는 저를 안고 우셨습니다. 글로 쓰고 있는 저는 이제야 울고 있습니다.
엄마는 저와 3년을 더 살아주고 돌아가셨는데 어릴 적 기억이 왜 이제야 선명히 살아나는지 모르겠습니다. TV가 있는 작은댁에 가자고 조른 저에게 “꾸어준 돈 받아와서 수박 사 갖고 가자, 잠깐 기다려.”하고 이웃집에 가신 분이 영영 오지 않으셨습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이별은 그렇게 갑자기 오고, 짧디 짧은 순간에 모든 게 단절됩니다. 준비 안 된 이별은 그래서 무섭기도 합니다. 삶과 죽음은 종이 한 장 차이라고도 말하지요. 그러나 그때가 예기치 못한 때일 때 무너지지 않는 사람은 없겠죠.
옛날 전차 타고 지나던 서울시청광장에 지금은 신식 전철이 땅 속으로 다닙니다. 땅 위엔 수많은 촛불이 켜지기도 하고 커다란 스케이트장이 서기도 합니다. 그때 제 또래의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물끄러미 봅니다. 제가 거기 섞여있고 엄마가 쳐다보시는 환상에 빠질 때엔 눈물이 입으로 흐릅니다.
저는 아주 오랜만에 자판을 두드리며 눈물을 먹고 있습니다. 눈물 맛이 괜찮습니다,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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